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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라책방 Mar 22. 2021

[로망]을 보고

목수와 그의 아내 - 26

마트에서 제주 무가 맛있다길래 호기롭게 사 봤다. 생전 처음으로 깍두기를 담가봤다. 오호!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내 손맛이 아닌 무가 열 일 한 깍두기를 친정에 맛 보여드리려고 가져갔다. 친정에 도착해보니 엄마 눈이 벌갰다. 조금 운 것 같았다. 무슨 일일까?

"엄마 울었어?"

"어."

"왜?"

"영화 봤어."

"두 분이서 극장에 갔어?"

"아니. TV로."

나른한 햇살이 비치는 오후에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관람한 영화는 이순재, 정영숙의 [로망]이었다. 낯설어서 극장 가기를 꺼리시는 부모님이 웬일인가 싶었는데 '내 얘기 같아서 봤다'라고 말씀하셔서 코끝이 찡했다. 

두 노인네가 치매 걸려서 바닷가에 앉아 있는 장면이 제일 기억나. 젊어서 열심히 일해 가지고 새끼들 박사까지 만들어 놨더니 직장도 못 잡고 낚시나 하러 다니더라고. 할머니가 먼저 치매가 걸렸는데 나중에는 할아버지도 치매였어. 부부가 번갈아가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거야. 한 명씩.


요즘 들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엄마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나 보다. 운전을 그렇게 잘하던 우리 엄마는 어느 날 핸들을 놓았고, 이제는 운전석은 물론이고 조수석에도 앉기 싫어하신다. 운전을 안 하니 외출 횟수가 줄어들었고, 그만큼 외부와 접촉을 하지 않으니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 같았다.

아들이 '돈 벌어서 밥 먹여주고 공부시켜주면 부모 노릇 다 하는 거냐!'라고 막 소리를 지르더라고. 어휴... 내 자식들은 안 그러지만 그런 자식을 보니 내 마음이 막 답답하더라고.


엄마가 영화에 너무 빠졌었나 보다. 그래서 엄마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우리는 엄마랑 아빠가 밥 먹여 주고 공부시켜줘서 알마나 감사한지 몰라. 내 맘 알지?"

엄마는 '알지~'라는 대답을 하면서 영화 얘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결국 둘이 죽을라고 작정을 하고 나섰어. 안전띠도 다 풀고 고속도로에서 막 달린 거야. 그런데 글쎄 순경한테 과속으로 붙잡힌 거야. 그러고는 어쩔 수 없이 가다~가다~ 바닷가 어느 숙소에 도착했어. 죽을래도 죽을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지. 그리곤 깼는데 옆에 할머니가 없는 거야. 


이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할머니가 어디 가셨을까... 엄마에게 듣는 영화는 스크린으로 보는 것보다 거 영화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라고 물을 새도 없이 엄마는 말을 하고 있었다.

바닷가 모래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고 할아버지가 그리로 갔지. 옆에 앉으며 '추운데 왜 나와 있냐'라며 툭 치니까 할머니가 죽은 거야. 허망하게 죽더라고.


듣고 있자니... 엄마가 이렇게 말을 길게 많이 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말을 하는 쪽은 아빠였고, 엄마는 틀린 부분을 수정하거나 너무 길어지는 말을 자르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영화의 내용을 마치 본인의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전달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엄마~ 그럼 내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들어올까?"

"아니~ 어떻게 그래!"

"영화를 이렇게 감명 깊게 보는 우리 엄마~ 오늘 극장이나 갈까?"

"싫어. 그냥 집에서 불고기나 먹자."

우리 엄마의 로망은 손수 지은 밥으로 자식들 배불리 먹이는 것이다. 엄마의 로망이 담긴 불고기에 내가 담근 깍두기를 얹어 먹었다. 궁합이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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