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 11
독백을 들으며 추궁당하는 느낌이었어. 화자의 역할을 설정한 자체가 자기 고백으로 들리기도 했고. 은근히 우리를 쪼면서 나의 이중성을 돌아보게 하더라.
화자의 자기 고발이지만 우리더러도 스스로를 돌아보면 고발할 것이 천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월감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면 본능적으로 타인과 비교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우월하다는 정의가 끊임없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고백할 것이 너무나 많은 존재들이다.
인간은 Sex와 신문에 빠져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한다는 문장에서 세상사가 어쩌면 이렇게 변함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신문은 시대적 배경으로 보았을 때 오늘날의 SNS와 같다. 차이라면 신문은 일방적 소통이지만 SNS는 쌍방... 흠. 쌍방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둘 사이에 여러 가지 차이점은 있지만 둘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매체라는 것은 틀림없는 공통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원시림의 침묵'은 지난주 읽었던 '피로 사회'의 '깊은 심심함'과 통하는 것 같아.
떠버리. 화자는 떠벌이다. 귀가 아프도록 옆에서 계속 중얼중얼 거리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원시림의 침묵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 말해주는 것이다. 떠벌리는 삶의 공허함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도.
원죄를 지은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인간으로 태어난 죄를 인식하며, 나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생각해야 해. 나 자신을 돌아보며 본질적인 나와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 전락이라는 두 글자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버거웠어.
어디를 봐도 부족함이 없는 주인공.
본인이 스스로를 생각해도 이보다 더 바람직할 수 없는 최상의 상태였다. 하지만 어느 날 밤 강에서 투신하는 여자를 심드렁하게 지나쳤던 죄책감으로 계속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신의 심판이 두려워 인간의 판단에 맡기고, 이 판단에 근거한 삶이 완벽하다는 믿음. 결국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오만한 모습을 지적하는 것 같았어. 인간은 기본적으로 개개인의 이해관계에 근거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합리적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우리의 판단이 완벽하다는 믿음.
이 자체로 인간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완벽할 수 있을까? 신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려면 영원히 살아야지. 티 하나 없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나약하다. 나약한 존재이므로 전락한다. 전락하는 모습에서 절망을 감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신앙을 가진다. 딛고 일어설 디딤판으로.
자기 자신을 구하는 방법을 모른다. 여자를 구하지 못한 것이 곧 자기도 구하지 못한 꼴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다시 말해 그 여자를 구하려면 물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내가 다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나를 보호하느라고 뛰어들지 못했다. 그것이 주인공을 우월적 떠버리로 만들어 버렸다. 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구해야 하지만 인간의 위선적 입장에서는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나는 읽으면서 너무 아팠어. 인간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존재감이 슬프게 밀려들었다는 표현은 어떨까.
주인공은 속죄 판사가 되어 청자와 독자를 계속 속죄하게 만든다. 술집에 앉아 자기의 과오를 먼저 고백하면서 상대방도 본인의 죄를 돌아보도록 한다. 심지어 이렇게 잘난 나도 실수를 하는데 당신의 죄는 널리고 널렸음을 강조한다.
주어를 '나'에서 '우리'로 교묘하게 확장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깜박 속아 넘어간다. 그러면서 그와 동화되어 속죄하며 내 인생의 처절함에 슬퍼진다.
가볍게 말하자면 나 잘난 맛에 산다는 책이고,
무겁게 말하자면 우리는 성수 받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계속 다시 태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