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증거, 기록

09 - 다이어리

by 미칼라책방

연말이 되면 보험회사나 지인으로부터 다이어리와 탁상달력을 여럿 받는다. 이중 손에 짝짝 붙는 스타일로 일 년을 정리하고 계획한다. 책장 여기저기에 꼽혀 있는 걸 한참 뒤적이며 찾은 것이 이만큼이다. 10년 치 다이어리. 이렇게 모아서 보니 나는 기록에 대한 욕구는 강하지만 정리는 잼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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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찾아도 2019년 다이어리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당장 어제 일도 순서가 왔다 갔다 하는데 19년 다이어리를 찾다가 결국 '정리 좀 하자. 정리 좀.'이라며 자책했다. 오늘 찾은 연도 이전의 다이어리들은 아마도 이사를 여러 번 하면서 분실한 것 같다. 이사라는 핑계가 있어서 다행이다. 정리를 못하는 내 모습이 더 적나라하게 까발려지지 않을 수 있어서.


그리고 아깝다. 이렇게 모아서 보니 모든 것이 나에 대한 기록들인데 분실한 내 과거들이 너무 아까웠다. 앞으로는 잘 챙겨야지라는 결심을 하며 제일 높은 칸에 나란히 꽂아 놓았다. 앞으로는 잊지 말아야지, 나를.


기록은 기억을 위한 증거를 남기는 것이다. 신문 구독료를 냈는지 기억하고, 아이들의 학원비가 잘 결제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침부터 밤까지 종종거리며 움직인 증거들을 차고 넘치도록 담아 놓아야 내가 살아있는 것이 증명될 테니 말이다.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서류 말고 내 존재의 증명이 필요하다.


살아있지 않음은 죽어 있는 것이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죽음을 처음 경험했다. 나는 손녀였고, 아빠의 형제자매들이 많았기에 내 슬픔은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보잘것없는 부분이었다. 직장 동료 40여 명이 워크숍을 다녀오는 길에 관광버스가 곧장 장례식장으로 왔다. 나의 직장 동료 40여 명과 함께 할아버지를 조문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처음 맞닥뜨리는 죽음과 제대로 인사 한 번 못한 기분이다. 고개를 들지 못했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나는 죽음이 두려워졌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 할아버지와 아직 인사를 끝내지 못했다. 아직도 바이바이를 하고 있다.


한 손은 죽음과 계속 이별을 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 손은 이승에 있음을 자각하기 위해 쓰고 있다. 내가 기록하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매일을 남기고 있었구나! 더불어 나는 기록 말고도 남편과 부모와 아이들과 다른 여러 가지 매개들로 나를 뿜어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도처에 내가 살아있다.


다행이다. 오늘 이 글로 나는 계속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