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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잔 Sep 20. 2022

[,] 결혼을 전제로 진지한 만남 중입니다

봄에서 겨울로, 연애에서 결혼으로


지금의 남편, 당시 남자 친구와 두 번째 만난 날이었다. 남편은 "어떤 남자 좋아해?" 또는 "이상형이 뭐야?"류의 질문을 했다. 나는 닭발을 뒤집으며 도도하게 답했다.


“이상형은 모르겠고, 이젠 결혼 생각 없는 남자라면 만나고 싶지 않아.”


이별에 질려가던 중이었다. 밥을 먹다가, 거리를 걷다가도 헤어진 그놈의 안부가 궁금해 카톡을 뒤지는 내가 싫었고, 이별만 했다하면 무너지는 부실공사 멘털을 고쳐 쓰는 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이번에 사랑하게 될 남자와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반자발적 비혼으로 사는 플랜 B도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그는 적잖이 놀란 듯했지만 본인도 그렇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나중에 물어보니 역시 얼버무린 게 맞았다. 그의 인생 계획은 본인이 생각하는 경제적 준비가 완벽히 됐다 싶을 때 천천히 결혼하는 거였단다. 하지만 나의 대답 하나로 그의 계획은 무산됐고, 우리의 연애는 ‘결혼을 전제로 한 진지한 만남’이 되었다.


끝을 정해둔 연애는 재미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와 연애를 막 시작한 그 봄은 지나온 중 가장 분홍 빛이었다.





여름


사귄 지 6개월쯤 되던 여름,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까지 한 번도 없던 엄마의 도발.


“엄마 이모랑 서울 놀러 갈 거야. 올라가면 네 남친 보여줘"


강경하게 나오는 엄마를 말릴 수 없어 에라 모르겠다 남편에게 말해 버렸다. "아직은 좀 부담스러운데"라며 거절하는 게 정상인데 “어른이 보자고 하시는데 당연히 가야지"라며 응했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되찾은 듯한 안도감이 들었다.


비 내리던 여름밤, 보신각 뒷골목에서 남편은 2차 장소를 찾겠다며 겅중겅중 앞서고 있었다. 엄마와 이모, 남동생, 이종사촌 오빠 부부가 그 뒤를 아기 오리처럼 따랐다. 자리가 끝나갈 즈음 테이블 아래를 살펴보니 엄마와 남편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가을


우리는 제주도 어느 시골 마을,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남편은 암흑 속에서 갑작스러운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그건 다름 아닌, 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타인의 재무상황을 그렇게 소상히 알게 된 건 처음이었다. 여행 몇 주 전, 내가 연봉을 까보자(?) 할 때 당황하더니, 답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듯 했다. 그는 내가 불안해하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을 놓치면 많이 후회하겠구나. 놓치지 말자.’


그리고 기회가 왔다. 한민족의 최대 명절 , 남편에게 각자 상대 부모님 선물을 사자고 했다. "자기 부모님께서 자기가 우리 엄마 만난 거 아신다며. 그럼 이렇게 명절 선물로나마 먼저 인사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 (지금 생각해보니 거의 가스라이팅이었네.) 그런 거 안 해도 된다던 남편은 어느새 나와 함께 마장동을 누비고 있었다. LA갈비는 블랙앵거스여야 한다는 그의 눈이 비장했다.



겨울



남편 회사 과장님이 남편에게 "OO도 이제 집에 관심 가져야지?"라며 분양하는 아파트 정보를 흘려준 모양이었다. 남편은 내게 부동산 공부를 같이 해보자며 의욕적이었다.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어쩌자는 거지? 나는 당장 3개월 후면 내 몸 하나 뉘일 방 한 칸이 없다고 이 양반아.’


"나 사실 이번에 자취방 계약 끝나면 대출을 좀 껴서라도 조금 큰 집을 얻어보려구 해. 우리가 계속 잘 만나게 되면 일단 그 집에서 같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건 거의 청혼하라는 협박이었다. 남편은 잠시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우리 지금부터 같이 살 집을 알아볼까?"


심장이 콩, 하고 살짝 아래로 내려온 느낌. 대답을 않고 웃기만 하자 남편이 씩 웃으며 하는 말.


"나랑 결혼할 거잖아. 아냐?"

"그래 하자."


그렇게 우리는 사당동의 자그마한 보쌈집에서 결혼을 약속했다. 엎드려 받은 프러포즈라해도 기뻤다. 내 삶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본격 등장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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