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난날 연애에 대한 소고
아기를 낳고 사라진 세 가지가 있다면 시간과 체력, 그리고 성욕이다. 아이가 18개월일 때 친한 언니를 만나 나의 성욕상실(?)에 대해 고백했다. 신혼이었던 언니는 성적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집에서 슬립을 입고 향수도 뿌린다고 했다. 그랬던 언니도 출산했다. 나는 언니가 여전히 노력 중인지 궁금했다.
“언니는 여전히 좋아?”
“아니. 아이 낳고 한 번도 안 했어.”
연애의 사전적 의미는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이다. 5세 미만 아이를 키우며 여전히 연인의 긴장을 유지하는 부부를 본 적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다년간의 근력운동을 통해 몇 달쯤 밤잠을 설쳐도 괜찮은 체력을 구축했거나, 육아도우미를 지속해서 고용할 수 있는 재력을 지녔을 것이다. (쇼윈도 부부일 가능성도 크다.)
언니와 나의 연애시대는 출산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육아의 고단함을 토해내던 언니는 대화 짬짬이 3~4년쯤 전으로 돌아가 향수에 젖는 듯했다. 그 시절 우리 삶에는 썸과 연애가 부지런히도 떴다가 졌다. 완전한 타인이었던 두 사람이 바라보게 되고, 궁금해지고, 알게 되고, 갖고 싶어지고, 가까워지는 황홀경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연애시절이 그립지 않다. 아니, 연애를 끝낸 지금의 안정감이 만족스럽다. 피치 못할 이유로 남편과 헤어지게 된다 해도 다시 누군가를 사귀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것 같지 않다. 왜일까. 나는 왜 그 좋은 연애를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살다가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 대사를 통해 알게 됐다.
“누구랑 있으면 좀 나아 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그렇게 고르고 골라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지는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 해.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리.”
전적으로 준 적이, 응원한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나보다 커야 하고, 일도 가족도 취미도 아닌 내가 1순위여야 하며, 가까운 미래에 나와의 결혼을 꿈꾸고 준비했으면 했다. 주말에 일어났을 텐데도 연락이 없거나, 데이트 후 헤어지는 시간이 빨라지거나, 잠들기 전 보내는 마지막 톡에 하트가 없으면 뒤척였다. 기묘한 꿈을 꿨다.
내 연애의 중심엔 헤어짐이 있었다.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헤어짐을 생각했다. ‘이 사람과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만나면서는 생각했다. ‘이 사람을 놓치면 영영 혼자가 될 것 같은데.’ 이별 후에는 생각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어.’ 이게 내가 연애를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매년 3월이면 전국의 어린이집들은 건물 둘레에 통곡의 벽을 세운다.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매일 아침 온 힘을 다해 울부짖는다. 슬피 우는 아이가 가여워 다시 집으로 데려가는 엄마들도 있고, 알림장이 올 때까지 가시방석인 이들은 허다하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엄마들에게 부탁한다. 단호하고 태연하게 돌아서 달라고, 아이는 곧 적응할 테니 빠지지 말고 데려와 달라고.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다. 이제는 어린이집 주변엔 눈부시게 하얀 이팝나무만 가득하다. 통곡의 벽은 온데간데없이 고요하다. 아이들은 마침내 헤어짐을 받아들였다. 엄마와 반나절 떨어져 있더라도 자신들이 여전히 보호받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별 앞에 덜덜 떨던 그 시절의 내게 어린이집 봄 아침 풍경들을 붙여 넣어 빨리감기로 보여주고 싶다. 그 남자가 네 곁에 있든 없든 넌 여전히 충분한 존재라고. 불안을 떨치고 네 앞의 아름다운 것들을 제대로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