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1. 아침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수많은 발걸음이 같은 방향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출근길 물결 속에 섞여 걷다 보면, 내가 나를 끌고 가는 건지, 아니면 어딘가에 끌려가는 건지 헷갈린다.
2. 우리는 일에서 나를 찾고 싶어 한다.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이름이 되기를, 이 자리가 나의 무대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바람은 종종 통장에 찍힌 숫자 앞에서 조용히 멈춰 선다.
3. 입에 풀칠하기 위해 붙잡은 자리, 버티기 위해 반복하는 보고서.
그 사이에서 꿈은 때때로 숨을 고르고, 현실만이 성급히 손을 든다.
4. 직장은 자아실현의 무대이기를 원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생존의 틀이다.
그래서일까, 하루의 끝에 남는 건 성취감보다 내가 아직 나이기를 바라는 작은 기도다.
직장은 굶지 않기 위해 버티는 자리이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묻는 자리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말했듯, 노동은 삶을 지탱하지만, 일이 남기는 건 세계다.
우리는 그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으로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