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1. 상담실 안에서의 침묵은 늘 한쪽만의 일이 아닙니다. 내담자가 조용히 말을 멈춘 순간, 상담자도 함께 멈춰 서게 됩니다. 공간은 고요해지지만, 상담자 안에서는 아주 미세한 파장이 일기 시작합니다.
"뭔가 내가 놓친 건 아닐까?", "지금 이 조용함, 내 탓은 아닐까?" 조용한 순간이 길어질수록, 상담자의 내면은 점점 더 분주해집니다.
2. 초심 상담자일수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압박을 받기도 합니다.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공감을 표현하고, 정리하고 요약하며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침묵은 마치 그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불안감을 줍니다. 이 불안을 그대로 마주하기 어려우면, 상담자는 침묵을 이해하거나 수용하기보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는 충동에 휩싸이게 됩니다.
“내가 뭔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두면 시간만 흐르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은 때로는 내담자를 위한 배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담자 자신의 불안을 피하려는 움직임일 수도 있습니다.
3. 침묵 앞에서 상담자가 무력감이나 고립감, 관계가 단절된 듯한 허전함이나 버려진 감각이 올라온다면, 그 감정은 과거의 기억을 건드리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대상관계 이론에 따르면, 이런 순간 상담자는 자신도 모르게 과거 자신이 겪었던 ‘응답 없는 관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때의 불안과 허무가 현재 장면에 스며들면, 상담자는 이 침묵을 단순한 고요가 아닌 '관계의 실패'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침묵을 이해하기보다 피하고 싶어지고, 공감보다는 ‘무언가 하려는’ 움직임이 앞서게 됩니다.
4. 저 역시 그랬습니다. 말이 멈춘 순간, 제 안에선 수많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뭔가 해야 하지 않나’, ‘이 고요를 깨야 하지 않나’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안의 조급함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건 내담자의 마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 앞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두려웠던 거였습니다.
그 침묵은 내담자의 무언이면서, 동시에 제 안의 조바심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5. 그 거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 있다는 것, 아무 말도 없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은 없지만, 마음은 여전히 흐르고 있으며, 말없이도 전해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 앞에서 상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뭔가 하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하지 않음으로써 하게 된다는, 칼 로저스(인간중심이론 창시자)의 태도처럼, 그 고요함 속에 머물며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6. 상담자가 침묵을 견딘다는 건, 내담자의 세계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되, 무례하게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 문이 열리지 않아도, 누군가 거기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일.
혼자 열 수 있도록, 다그치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주는 일.
어쩌면 상담이란, 그런 기다림의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