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사회에서 살아남기 (하)

"소비의 역사" 깊게 읽기

by 그리다 세계여행

*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7.

이렇듯 물건을 만들어내는 만큼 그것을 소비하게끔 하는 것의 중요성 또한 분명해보입니다. 그런데 왜 옛날엔 그렇게 소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은 생산력이 소비력에 비해 한참 모자랐기 때문이에요. 생산력이 소비력을 뛰어넘기 시작한 것은 기술의 발전으로 기계동력을 생산에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에요. 이것도 넓게 봐준 것이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대량생산은 전기와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벨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게 1913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겨우 100년이 넘은 수준이에요.


소비의 중요성이 사회 전체에 부각되기 시작된 건 바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1929)입니다. 생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지만, 정작 대량생산된 제품을 소비해야 되는 노동자들은 충분한 소득이 없어 재고만 쌓이다보니 기업들이 도산한 것이에요. 대공황 이후에는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에 따라 국가가 소비의 근간인 총수요를 관리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포디즘'이라는 대량생산 시대를 연 자동차왕 헨리 포드(좌),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이론을 제시한 존 케인즈(우)


8.

대공황 이전에도 소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기업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물건을 더 팔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습니다. 판매를 진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새로운 소비자를 만나는 것이고, 하나는 기존 고객에게 물건을 더 자주 파는 것이죠. 근대사회는 이 문제를 각각 광고와 ‘계획적 진부화’라는 개념으로 극복하고자 합니다.


근대사회 이전에도 광고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포스터정도였기 때문에 그 파급력은 제한적이었어요. 그런데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매스미디어가 등장함에 따라,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접근하기가 용이해지기 시작한 것이죠. 신문, 잡지, TV, 라디오, 영화 등의 대중매체는 수많은 잠재고객들에게 상품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때는 광고의 경로가 몹시 한정되어있었고 광고를 할만한 기업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광고를 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비슷한 상품을 입고, 먹고, 마시고, 즐기게 되면서 소비경험 또한 비슷해져갔습니다. 바야흐로 대량생산 시대에 걸맞는 덩어리mass로서의 대중mass이 탄생한 것이죠. 이는 근대사회 인간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구성하게 됩니다.


9.

다음으로는 ‘계획적 진부화’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해볼게요. 혹시 삼성의 갤럭시S2가 ‘너무 잘 만들어서 망한 폰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얼핏 들으면 모순적인 말 같죠. 잘 만들었으면 잘 팔려야지, 왜 망한 폰일까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섞어볼게요. 제가 바로 갤럭시S2 유저였는데요, 저는 전자기기는 특별한 고장이 있지 않는 한 ‘아직 쓸만한데?’라고 하면서 계속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략 42개월을 갤럭시S2를 썼어요. 참고로 이때는 소위 ‘단통법(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이 제정되지 않았던 때라 평균 핸드폰 교체주기가 20개월이던 시절입니다. 저는 평균주기의 두 배도 넘는 기간 동안 핸드폰을 썼던 거죠. 심지어 한번은 3층에서 지하4층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려서 본체와 배터리, 덮개, 케이스가 4단 분리되는 사고를 겪었음에도 다시 결합해서 전원을 켜니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켜지더라고요. 감탄스럽긴 했지만, 꼭 좀비를 보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했습니다.


만약 저 같은 고객과 S2 같은 핸드폰만 있다면 삼성의 매출은 반토막이 났겠죠. 이제 ‘정말 잘 만들어서 망한 폰이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만약 핸드폰이 적당히 고장이 났으면 새로운 제품을 샀을 테니까 말이죠. 그래서 기업들은 의도적으로 제품의 수명이 너무 길지 않게 만듭니다. 듀폰이라는 회사가 이미 오래 전에 ‘절대로 올이 나가지 않는 스타킹’을 만들었지만 시장에 내놓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갤럭시 S2(좌)와 듀퐁의 '올이 나가지 않는' 스타킹(우). 너무 잘 만들어서 망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계획적 진부화’는 이렇게 제품의 기능적 수명을 조절하는 것 외에도 빠르게 유행을 교체함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함께 읽어볼게요.

사전에서 쓰레기는 "못 쓰게 되어 내다 버릴 또는 내다 버린 물건"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쓰레기란 단지 원하지 않는 물건이다. 유행이 지난 옷을 입는 것은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이고, 더 좋은 물건들이 있는데도 옛것을 고수하는 태도는 미련한 짓이다. (중략) 더 많은 생산을 위해서는 옛것이 버려져야만 한다. 결국 쓰레기는 경제의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부산물인 것이다. (“마케팅 지배사회”, 129페이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옷이고 지금도 입을 수는 있지만, 차마 입고 다니기엔 촌스러워서’ 옷을 버려본 기억은 누구나 다 있을 거예요.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를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닌 그것이 주는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옷을 통해서 단순히 체온을 조절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라는 이미지를 획득하는 것이죠. 같은 맥락에서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내구성 가전제품도 아직 멀쩡하더라도 신제품이 자꾸 나오면 바꿔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멀쩡한데 왜 버려!”라는 어머님들의 말씀은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상품은 이제 ‘기능’이 아니라, ‘내가 멋진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호’로서 소비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 ‘멋진 삶’은 TV와 인터넷, 잡지들이 항상 강조하는 유행을 통해서 소개되지요. 유행이 빠르게 교체될수록 기업은 행복해지고 지갑은 얇아집니다.


10.

자, 먼 길까지 오셨습니다. 이제 끝나가니까, 조금만 더 집중해볼게요!

우리는 여기까지 소비라는 개념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알아봤습니다. 초창기에는 부족한 생산력 때문에 항상 ‘억제되어야 할 사치’라는 오명을 썼던 소비는 이제 우리 삶에 당당히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비하려는 욕망’ 앞에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us’로서 모두 평등해졌습니다. 하지만, 정말 평등할까요?


어쩌면 소비사회는 불평등을 더욱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욕망은 동일해졌는데, 그걸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은 천차만별이니 비교가 더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그 돈이 없다는 게 너무 뼈아픕니다. 그런데 미디어는 그걸 24시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그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구매력은 비슷한데, 미디어는 매번 슈퍼리치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비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여줍니다. 수많은 온오프라인 잡지들은 다른 사람들의 (연출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정도는 살아야 품격있는 생활양식을 누리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교육합니다. 비단 대중매체뿐만 아니라, 소비사회의 개인은 1인 미디어를 통해 ‘자랑할 만한 소비를 하는 나 자신’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전방위로 송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소비하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힙한 삶’이며, 우리가 쫓아야 할 모범이라고 생각하죠. 이제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소비를 통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데만 맞춰져있고, 이것이 사회적 성취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소비사회의 인간은 그렇게 끊임없이 ‘무엇을 소비해야 잘 소비했다고 소문이 날까’를 고민하며, 자랑스러운 소비의 순간을 인스타그램에 올릴 설렘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깊은 생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인간의 삶을 일상과 비일상으로 나누었습니다. 일상은 낮의 시간이자 노동과 생산의 시간이고, 비일상은 밤의 시간이자 유흥과 소비의 시간이라고 말하였죠. 그의 통찰대로, 우리는 비일상적인 경험을 할 때 더 돈을 쉽게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디즈니랜드에서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직원들이 지하의 통로로 이동한다고 해요. 고객들의 비일상을 깨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갑에 있는 모든 돈을 다 써버린 순간 우리는 그 비일상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일상에서의 고통을 견뎌 지갑을 채우고 나면 또 비일상으로 향하지만 그것은 끝이 예정되어있는 잠깐의 쾌락밖에 되지 않지요. 일종의 시지프스적인 비애랄까요. 이러한 일상과 비일상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비사회의 인간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꿈과 희망의 디즈니랜드는, 입장권을 살 수 있을 때만이 나의 세계가 됩니다.

명확한 끝맺음은 아니지만, 오늘의 글은 의도적으로 여기서 마치고자 합니다. 오늘도 들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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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이미지 정보: 봉마르셰 백화점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

※ 함께 읽어볼 것들

1. 도서 <소비의 역사> 설혜심 作 ★★★★☆

생산의 그림자에 감춰져왔던 소비의 미시사를 적극적으로 파헤친 책입니다. 각 소주제들의 분석은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잘 풀어내었으나, 인터넷에 연재하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약간 아쉽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알아두면 쓸데없는’ 소소한 상식들이 재미있어 읽어볼만 합니다. 특히 소매업계 등 B2C 마케팅 관련된 직종의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추천 드려요.


2. 도서 <마케팅 지배사회> 송재도 作 ★★★★☆

기업들이 만들어낸 마케팅 기획이 소비자의 무의식을 어떻게 형성시키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해냅니다. 마케팅의 일반원리를 설명하고, 그러한 원리가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 여러 개를 곁들이는 식입니다. 비판적인 시각을 기른다는 점에서 ‘마케팅 입문서/실용서’라기보단 ‘마케팅 철학서’에 가깝겠네요. 끝부분에 갈수록 주관적인 가치관이 담긴 주장이 나와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하지만, 70%까지만 읽어봐도 풍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습니다.


3. 도서 <상처받지 않을 권리> 강신주 作 ★★★★★

자기계발서 같지만 교양철학서입니다. 강신주 저작 중에서는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무의식은 어떻게 상처받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제 글을 읽고 나서 관련 주제를 원하시는 거라면 3부와 4부를 읽으시는 걸 추천드려요. 물론 정말 좋은 책이기에, 시간이 되신다면 1부와 2부도 읽으신다면 절대 후회하진 않으실 거예요. 절판된 게 너무나 아쉬운 책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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