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피로사회'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엮어읽기
1.
서울 성북구에 사는 직장인 김현수 씨의 사연입니다.
‘저는 보통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납니다. 일어나면 먼저 중국어학원 새벽반에 가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 뒤에 출근을 합니다. 저는 직장에서 능력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항상 회사를 위해서 전투적으로 일을 해서인지 선배님들도 좋게 봐주시고, 지난달에는 3개월 동안 밤낮없이 야근하며 완성한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번 분기 최우수 사원으로 선정됐어요. 이 성과를 이어가기 위해서 이번 달도 미친 듯이 일하고 있어요. 보통 여덟 시쯤에 퇴근을 하는데, 오늘은 동기들끼리 인스타그램에서 엄청 유명한 수제맥주 집에서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고 들어왔어요. 피곤하긴 했지만 하도 핫한 데라 저만 빠지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집에 들어오니까 열시가 조금 넘었는데, 씻고 나와서는 열한시부터 다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다음 달에 진급심사가 있거든요. 원래 열두 시쯤에는 피곤해서 기절하듯이 자는데, 오늘따라 고민 때문에 잠이 잘 오지가 않아서 사연을 씁니다.
저, 잘 살고 있는 것 맞나요?‘
2.
바야흐로 자기계발의 시대입니다. 서점에 가면 온갖 자기계발 서적들로 매대가 가득 차있고, TV와 인터넷에서는 ‘멋있게’ 사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낭만적으로 그려지죠. 비록 작심삼일이지만 연말 연초만 되면 새롭게 짜여지는 신년계획엔 ‘외국어 공부’와 ‘운동하기’는 매년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입니다. 무엇인가 내세울만한 자기계발 활동이 없으면 꼭 인생을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은 불안함이 드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김현수 씨는 분명히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일찍 일어나서 외국어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직장에서는 열심히 일을 해서 인정도 받고, 핫플레이스도 빠짐없이 방문하는 멋진 현대인이잖아요.
그런데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열심히 살고 있지만 그 삶은 ‘죽은 노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신자유주의적 사회는 노동자를 노동자로 내버려두지 않고 ‘스스로를 경영하는 경영자’의 정체성을 덧씌우지만, 이는 ‘가짜 정체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현대사회가 어떻게 현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두 개의 저작 ‘피로사회’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엮어 읽어봄으로써 알아볼게요.
3.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비록 역사가 진행되면서 그 분업의 양태는 달라졌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노동을 해야 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재밌는 것은 인류가 일을 해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일 또는 노동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변해왔다는 것이에요. 산업혁명 이전의 노동은 일종의 ‘장인노동’이었습니다. 철수가 신발을 만든다면, 재료를 직접 사서 사이즈에 맞게 가죽을 자르고, 바느질을 끝내고 마무리하는 작업까지 한 사람이 맡아서 만들었죠. 그래서 제작자는 신발 만들기의 전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신발장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발생함에 따라 공장이 세워지는데, 이는 이전까지의 장인노동과는 다른 종류의 노동을 요구하였어요. 바로 공장제 기계공업에 맞는 ‘공장형 노동’이었죠. 공장은 생산량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분업(分業), 즉 일을 나눴습니다. 똑같이 신발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공정을 나눠서 철수는 재료를 사오기만 전담하고, 진영이는 가죽을 자르기만 하고, 영석이는 바느질만 하기로 합니다. 이럴 경우 놀라울 정도로 생산성이 개선됩니다. 이전엔 세 명이 세 켤레를 만들 시간동안 이제는 열 켤레도 더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이 과정이 진행될수록 공정은 더욱 세분화되고, 더 나아가 컨베이어 벨트 같은 기술까지 도입되면서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로 진입합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인류는 전에 없던 풍요의 시대를 만끽하게 되었어요.
4.
하지만 이런 방식의 문제점은 노동자를 단순히 생산과정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은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이전에는 제작의 전 과정을 통제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했었는데, 이제는 극도로 세분화된 공정 속에서 자기가 맡은 아주 작은 일 하나만을 반복적으로 실행하게 됩니다. 고전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던, 같은 자리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갖다주는 제품의 나사를 조이는 일만 하던 노동자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모습이죠. 이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신발을 만드니까 다 만들었을 때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신발 밑창을 만드는 방법밖에 모릅니다. 나의 역할은 그저 신발공장의 노동자1일 뿐이고,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나를 신발장인으로 불러주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장인노동에서 공장제 노동으로의 변화로 인해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일을 하는데 그 일은 ‘나의 일’이 아닌, ‘공장 또는 회사의 일’일 뿐인 것이죠.
5.
그러면 노동으로부터 아무런 보람도 느낄 수 없는데, 왜 우리가 노동을 해야 될까요? 답은 뻔하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을 하지요.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가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지금에야 당연한 얘기지만 산업혁명 초기만 해도 이는 생소한 얘기였습니다. 여유로운 농업노동의 리듬에서 정신없는 공업노동의 리듬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반발하였습니다. 자본주의는 이 반발을 무마하고 노동자들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했죠.
태초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었다. 농업을 위한 느긋한 리듬이 아닌, 공업을 위한 빠르고 정확한 리듬에 맞추어 일하는 것을 싫어했던 노동자들에게,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들이 '도덕의 이름'으로 강요되었던 것이다. 게으름과 불성실은 대표적인 악덕으로 설파되었고, 농업 사회의 인습들은 타파의 대상이었다.
이후 이러한 노동 윤리는 대량생산 시대를 맞이하여 한 번 더 바뀌었다. 노동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으로 선전'되었다. 바우만은 더 나아가 '잉여 가운데 더 많은 몫을 차지하는 능력이, 장인들이 공장 노동자로 바뀌면서 사라진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확실한 방법'으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노동은 비로소 따분한 도덕의 외피를 벗고 더 좋은 음식과 잠자리와 같이, 그 자체로 강력한 동력을 가진 것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돈이 노동의 목적으로 명시되면서 사회는 '소비 사회'로 전환되었다. - 지그문트 바우만, <새로운 빈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193p)
이제 노동자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주기적인 불황을 제외하고는)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기에, 누구나 일을 열심히 하면 그에 상응하는 부를 쌓을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죠. 비록 힘들고 재미없는 노동이지만, 노동의 뒤에 따라올 달콤한 월급이 노동자를 움직였습니다. 서구, 특히 미국의 노동자들은 주말이면 자동차를 끌고 대형마트에 가서 각종 가전제품과 식품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카트에 담고는 망설임 없이 구매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대량생산에 걸맞는 대량소비의 풍요로운 사회였죠.
하지만 서유럽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런 모습에 반기를 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소비만을 외치는 소비자본주의가 ‘배부른 돼지’ 같이 보였어요, 그들은 ‘배부른 돼지’의 차원을 넘어서 개인의 자아실현이 가능한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한 목소리가 집약적으로 터져나온 것이 1968년에 서유럽을 중심으로 발생한 ‘68혁명’이었어요. 68혁명은 단순히 한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사회 전반에 있어서의 반체제 운동이었습니다. 당연히 당시의 경제체제 또한 타도의 대상이었죠.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잠자코 당할 수만은 없죠?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우리의 자본주의는 한 단계 진화합니다. 이 시기에 뒤이어 등장한 경제사조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미학화’를 통하여 이 위기를 극복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불만에 대한 자본의 대답이었다. "자기 노동에서 소외되어 오로지 소비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노동자'에서 벗어나, 노동을 통해 모두가 자신을 실현하는 사회를 만들자. (...) 자, 이제 우리 모두 장인이 되자."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노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착취하기 위해 내건 슬로건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바로 노동의 미학화이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7p)
노동의 미학화에 있어서 핵심은, ‘수동적 객체로서의 노동자의 능동적 사용자화(혹은 경영자화)’입니다. 이제 노동은 단순히 노동력을 화폐와 교환하는 과정이 아니라, 산업혁명 이전의 장인들처럼 자신의 자아를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인식됩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과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명히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노동자로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돈 때문에 억지로 남이 시키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비참하잖아요. 대신 노동자들은 ‘비록 내가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건 맞지만, 난 이 일을 내가 원해서 하는거야.’라고 최면을 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는 내 인생을 가꾸는 경영자야’라는 마음가짐까지 내면화하죠. 이제 노동자는 사라지고, 사용자만이 존재하는 기묘한 사회가 등장하였습니다.
* 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