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노동의 사회(하)

‘피로사회’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엮어읽기

by 그리다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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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분위기는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참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시킨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계속 교육하고 감시해야 했지만, 이제는 노동자들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며 알아서 최선을 다하니까 생산성이 개선될 수 있었습니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고, 열심히 하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은 노동자로 하여금 밤낮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도록 만드는 마약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지는 야근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죠. 사용자가 잔소리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고 가는 노동자라니, 얼마나 간편한 존재인가요.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Projektil임이 드러난다. (피로사회, 1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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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스스로를 사용자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극한까지 몰고나가는 이 ‘피로사회’의 등장은 한편으로는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였습니다. 바로 일상적 우울증의 등장과, 성찰하지 못하는 자아의 탄생이죠.


여러분은 어떨 때 우울하신가요? 우울이라는 감정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친족이 아니더라도, 아는 사람의 장례식에 갔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때는 비록 슬플지언정, 이 감정을 정확히 우울함으로 표현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반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시험을 친 과목의 점수가 영 좋지 않을 때, 우리는 슬프다기보다는 우울하다고 얘기를 할 것입니다. 왜 둘 다 비슷한 부정적인 감정임에도 어떤 것은 슬프고 어떤 것은 우울할까요? 그것은 우울함에는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했을 때의 좌절감 그리고 무력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우울함을 사전에 검색해보면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내가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닌 이상) 내 탓이 아니죠. 반면 시험을 망친 것은 온전히 내 책임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우울함을 느낍니다.


성과주체를 강조하는 피로사회는 이런 우울증을 조장하는데 최적인 구조입니다. ‘네가 노력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믿어지는 사회에서 실패했을 때는 ‘네 실력과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원인을 찾기 마련이죠. 신분제 사회에서는 우울증이 발생할 여지가 훨씬 적습니다. 천민으로 태어난 대길이가 고관대작이 될 수 없는 건 신분 탓이지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잖아요. 그를 그렇게 낳아준 부모를 원망할지언정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깎아내리진 않을 겁니다. 반면 피로사회에서는,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노력부족을 탓하며 자신과의 전쟁을 계속해나갑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피로사회, 28p)


이 전쟁에서 쓰러지지 않는 승자가 되기 위해 성과주체들은 멈추지 않고 자기계발이라는 굴레에 목을 맵니다. 오늘 사연의 주인공 김현수 씨가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끊임없이 무언가에 정신을 쏟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노력을 멈추지 않는 그를 보며 세상은 ‘바람직한 청년’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잠시의 휴식도 없이 자기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람은 깊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외부의 소리에 최대한 민감하게 반응하고자 준비하고 있다면, 모든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느라 도통 집중할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 게임에 완벽히 포섭된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과잉활동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피로사회, 48p)


그런 사람들로 가득찬 사회는 68혁명 이전의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양치기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아무런 고민 없이 무리지어 움직이는 양떼들의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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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 듣고 일 열심히 하는 양들로 가득 찬 사회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양치기겠죠. 한국사회의 양치기들은 양들의 노력과 열정을 교묘하게 착취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열정페이’라는 신조어의 탄생으로 이어졌죠. 대표적인 문화산업인 영화/드라마업계에서는 스태프들의 혹사가 매일 밥 먹듯이 벌어집니다. 심지어는 28시간 동안 내리 일해서 1일 노동시간이 28시간으로 기록되는, ‘물리법칙을 초월한’ 일까지 벌어지고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19시간 39분으로 집계되는 곳이 드라마 제작현장입니다. 영화계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5년 연속 한국 영화 관람객 수가 1억명을 넘을 만큼 국내 영화산업이 호황이어도 스태프들은 주당 71.8시간을 일하고 연 평균 수입으로 1,445만원을 받습니다. 초과근무에 따른 수당도 지급되지 않고, 세 곳 중의 두 곳은 근로계약서 작성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스태프들을 착취합니다. 이러한 관행은 비단 문화산업뿐만이 아니라 보험업계, 판매영업직, IT업계, 네일아트 등 소비자 응대 서비스업 등 한국사회 전체에 뿌리 깊게 박혀있습니다. 애플리케이션 마켓의 경우, 해외의 애플은 플랫폼이 20~30%를 가져가는 반면 국내의 SKT나 KT는 70~80%를 가져갑니다. ‘너가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을 하는 거고, 당장의 돈보다 경력을 쌓아 나중에 성공하려는 열정을 갖고 살아야지!’라는 꼰대들의 논리에, 우리의 노동은 ‘열정’이라는 미명으로 값싸게 후려쳐지고 있습니다.


9.

영화 ‘마약왕’을 보면, 필로폰이라는 마약이 2차세계대전 중의 일본에서 개발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군인들의 공포를 잊게 하고,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피로를 잊게 하는 역할이었다네요. 마약을 투여한 노동자는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앞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열정이라는 마약 혹은 환상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이토록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의 삶을 잠시 멈춰야할 때입니다. 마약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이 멈춤의 순간에서만이 삶을 다시금 돌이켜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신자유주의 혹은 피로사회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인류가 이룩해온 발전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도 자괴파괴적인 극단일 뿐이니까요. 오히려 저는 ‘자기실현적 노동’을 통해서 주체가 노동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합니다. 평일의 1/3을 보내야하는 직장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제게는 너무 슬픈 일인 것 같거든요.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자유주의적 노동관의 비판적 계승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멈춰 서서 ‘이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맞다면, ‘노동을 통해 내가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혹시 누군가가 나의 노동을 부당하게 이용하고 있는건 아닌지’라고 물어야겠지요. 이 두 가지 질문에 자신 있게 응답할 수 있을 때야말로 진정 ‘나의 노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사용자와 노동자의 가장 큰 차이는 ‘나의 일을 하는가’, ‘남의 일을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는 노동과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되지 않도록, 이제는 우리 자신을 소외시키는 노동을, 죽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의 노동을 다시금 우리의 것으로 되찾아 와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오늘도 들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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