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놓친 것에 관하여

소설 <프랑켄슈타인> 리뷰

by 그리다 세계여행
“창조주여, 제가 간청하더이까, 진흙을 빚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하더이까, 어둠에서 저를 끌어내달라고……?”
《실낙원》(X.7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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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낳아달라고 했어?”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보신 적 있는 말이지 않나요? 사춘기 청소년들이 부모에게 한번 정도는 내뱉을 법한 고전적인 멘트죠. 후레자식도 이런 후레자식이 없는 배은망덕한 말이지만, 이번 시간에는 이 클리셰를 한 번 돌이켜서 생각해볼게요.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내가 부모에게 ‘나를 낳아주세요’라고 요청한 적은 없잖아요. ‘어느 나라 사람으로, 성별은 어떻게, 얼굴은 어떻고 키는 몇 정도로 낳아주세요’라는 식의 세부 요청사항은커녕 태어날지 말지의 가장 기본적인 갈림길에서조차도, 명시적인 동의는 물론 암묵적인 동의마저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의 탄생’에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이에요. 그렇다면 그러한 ‘창조’ 행위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같이 읽어볼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The Modern Prometheus)은 독자들이 이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해보도록 만듭니다.


(큰 반전은 없지만 스포일러가 있으니 조심해주세요!)

2.


이 캐릭터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이지만, 사실 이 캐릭터는 프랑켄슈타인이 아니에요. 소설의 주인공인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18세기의 스위스 제네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제네바의 평의원으로 오늘날로 치면 국회의원쯤 되는 유력 정치인입니다. 아버지가 다정하고 자식에게 관심이 많은 분이라 빅토르는 물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랍니다. 그 속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친구인 앙리와 엘리자베스, 이쁜 동생인 윌리엄과 함께 지내며 행복한 시절을 보내죠.


그 당시 유럽은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 해외에서 유학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요, 빅토르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빅토르는 10대 때 자연철학과 화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의 잉골슈타트 대학(오늘날 뮌헨대학교)으로 떠납니다. 이곳에서 공부하며 생명체의 신비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데까지 관심을 갖습니다. 수년의 연구 끝에 마침내 생명을 창조하게 된 빅토르.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2m 50cm의 몸체는 말도 안 되게 컸고, 피부는 일그러져 있으며, 노란색 눈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어요.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음을 직감한 빅토르는 겁에 질려 도망칩니다. 악몽을 꾸는 나날을 보내며 폐인같은 삶을 살던 빅토르는, 이제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편지에 제네바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제네바로 돌아오자마자 빅토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충격적인 비극이었습니다. 바로 동생 윌리엄의 죽음, 그것도 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윌리엄의 시체를 보니 목이 졸려 죽은 것이었죠. 빅토르는 범인이 바로 자신이 만든 괴물임을 확신합니다. 목에 난 손자국은 결코 보통 사람의 것일 수 없었거든요. 이 순간부터 빅토르는 자신이 만든 괴물을 찾아내 죽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살인용의자로 엉뚱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한 가족처럼 지냈던 하인인 유스틴이 지목되어 사형당한 것입니다. 본인은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윌리엄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유스틴의 옷주머니에서 발견되었거든요. 그렇게 집안사람이 둘씩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빅토르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그런 빅토르 앞에 괴물이 등장합니다. 괴물을 죽이려고 했던 빅토르는 괴물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한 손으로 가볍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의 괴력을 가진 거구의 사내(만약 그걸 사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죠)였거든요. 괴물은 빅토르에게 한 가지를 요청합니다. 빅토르가 자신을 만들었듯, 또 다른 여성형 피조물을 창조해주면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나겠다고요. 괴물이 더 이상 사람을 해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 빅토르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괴물에게 얼마간의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괴물과 헤어진 뒤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자 연구하던 빅토르. 문득 그의 제안대로 하는 것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괴물이 약속을 지킬 거란 보장도 없고, 새로운 괴물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하나이던 괴물이 둘로 늘어나는 결과만 낳을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이미 윌리엄과 유스틴을 죽게 만든 괴물의 요청을 들어준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빅토르는 괴물과의 약속을 깨고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습니다.


이때 빅토르는 연구를 진행할 겸, 깊은 슬픔으로부터 마음을 환기할 겸 오랜 친구 앙리와 함께 영국으로 여행을 가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앙리가 살해되어 해변가에서 발견되고 이번엔 피의자로 빅토르가 지목돼요. 물론 진범은 빅토르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란 걸 눈치 챈 괴물이었죠. 아버지와 치안판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혐의를 벗은 빅토르는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제네바로 돌아옵니다. 또 다시 집안에 드리운 깊은 슬픔의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아버지는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정해져있던 빅토르와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죠. 하지만 빅토르는 ‘너의 결혼식 날에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괴물의 예언에, 결혼식날 밤 엘리자베스를 지키고자 노력하지만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불행에 아버지도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합니다. 이제 빅토르에게 남은 가족은 아무도 없게 되었어요.


분노로 가득 찬 빅토르에게 남은 삶의 목표는 오직 괴물을 죽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의 흔적을 따라 추적하기를 수개월, 괴물과 빅토르는 점차 북극에 가까워집니다. 마침내 지평선 끝에 괴물이 보일 정도까지 괴물과 가까워진 빅토르. 하지만 빅토르의 복수는 결국 완성되지 못합니다. 얼음이 깨지며 더 이상 괴물에게 다가갈 수가 없게 되었고, 자신이 본 괴물의 마지막 모습은 차가운 북극의 빙산 위에서 멀어지는 모습이었을 뿐, 괴물을 직접 죽이지도, 생사를 확인하지도 못했죠. 괴물만 쫓느라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빅토르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어요. 다행히 주변을 지나가던 배에 구조되었지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빅토르의 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어요. 그렇게 빅토르는 며칠 뒤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괴물이 빅토르가 구조됐던 배에 찾아옵니다. 빅토르가 죽었다는 것에 슬퍼한 괴물은, 선장에게 자신은 스스로 장작 속에서 불타죽겠다고 말하고는 사라집니다.


3.


생각보다 허무하죠? 여기까지만 들으면 절대적인 악인인 나쁜 괴물을 만나 한 집안이 몰락하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을 위대한 소설로 만드는 것은, 바로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서입니다.

윌리엄을 죽인 뒤 빅토르를 만났을 때, 괴물은 빅토르가 자신을 찾았듯 자신도 빅토르를 찾고 있었다 고백합니다.

길잡이라고는 오로지 태양뿐이었다. 내가 지나쳐야 할 도시들의 이름도 몰랐고, 그 누구 하나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밖에 없었다. 물론 당신에게는 증오뿐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감정도 없고 심장도 없는 조물주! 내게 지각과 정념을 주고, 인류의 경악과 경멸을 한 몸에 받도록 나를 내쳐버리다니. 그러나 동정심과 보상을 요구할 사람도 당신뿐이었기에,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로부터 받고자 애썼던, 그러나 끝내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187p)


괴물은 태어났을 때부터 본인이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직감합니다. 자신을 만든 부모인 빅토르는 도망갔고,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흉측하였거든요. 자신을 본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는, 괴물은 사람의 눈에 띠지 않는 곳으로만 숨어 다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숲 속의 작은 통나무집을 발견한 괴물. 안에는 부유하진 않지만 화목하게 지내는 가족이 있었어요. 그들의 온기가 너무나도 부러웠던 괴물은 다락방에 숨어서나마 그들과 함께 살고 싶었어요. 비록 모습은 드러내지 못하지만 그들이 외출했을 때면 몰래 주변에서 장작을 패서 쌓아놓음으로써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가족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쌓여있는 장작을 보고는 ‘요정의 선물인가봐’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괴물은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놀랄 것은 뻔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었죠. 괴물은 마침내 그들의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로 합니다. 그래도 최대한 그들이 놀라지 않도록, 맹인인 할아버지가 혼자 집에 있을 때, 지나가는 여행자인 것처럼 할아버지와 먼저 친해지려는 계획을 세웠어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괴물을 따뜻하게 맞아줬어요. ‘가족과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괴물의 고민에 ‘솔직하기만 하면 당신의 가족도 당신을 반겨줄 것이다’라고 조언도 해줍니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왔고, 괴물의 모습을 보고는 모두 경악합니다. 그러고는 괴물이 충분히 설명하기도 전에 그를 집 안에서 몰아냅니다. 며칠 뒤, 가족들은 괴물을 버리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려요.


그때부터 괴물의 마음에는 증오와 분노만이 가득 찹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을 낳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은 빅토르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낳아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자신의 욕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놓고는 내 모습이 흉측하자 나를 버리고 간 나쁜 부모. 세상 모두가 자신을 욕하더라도 자식을 세상에 내놓은 책임 때문에라도 최소한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줬어야 했을 단 한 사람. 생명체로서 살기 위해 꼭 받아야할 것을 받기 위해 괴물은 빅토르를 찾아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빅토르는 괴물을 어떻게 대했나요. 물론 윌리엄이 죽은 상황이었기에 제정신을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괴물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마저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배신한 게 빅토르였죠. 다른 사람은 내 말을 믿어주지 않더라도 부모만은 자신의 말을 믿어줘야 했는데 괴물은 그러한 기대마저 배신당한 겁니다. 이때부터 괴물은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클레르발을 죽인 후, 나는 슬픔에 무너지고 철저히 피폐해진 심장을 안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프랑켄슈타인이 불쌍했다. 공포심에 가까운 연민을 느꼈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내 존재와 그에 수반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한 장본인이 감히 행복을 꿈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게는 비참과 절망을 쌓고 또 쌓아 안겨준 주제에 영영 금지된 감정과 열정을 누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력한 질투와 쓰디쓴 분노가 나를 끔찍하게 허기진 복수심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 하지만 막상 그녀가 죽었을 때! ...... 아니, 그때 나는 비참하지 않았다. 감정은 모두 훨훨 떨쳐버리고 고뇌는 모두 억누르고 흘러넘치는 절망을 만끽했다. 그 후로 악은 나의 선이 되었다. (299p)

어떤가요, 이래도 괴물을 절대적 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4.


예술작품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던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낯설게 하기’가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조금 어려운 말로는 ‘인식의 자동화 과정을 해체한다’고 하는데요.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맥락에서 굉장한 작품이라고 봐요. 우리가 평소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흉측한 존재에 대한 생각을 일깨우죠. 사실 괴물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부정적인 뉘앙스가 포함되어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빅토르의 시점으로만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린 대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타인의 관점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만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죠. <프랑켄슈타인>은 빅토르를 구조한 선장이, 빅토르가 하는 말을 편지로 옮겨 적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선장의 시선, 빅토르의 시선, 그리고 괴물의 말을 통해 괴물의 시선이 겹쳐지며 사건으로부터 한발짝 벗어나 접근하게 됩니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인가를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일방적인 관계로부터 쌍방이 노력해야 하는 상호적 관계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창조는 결코 피조물이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창조주의 의지일 뿐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그 자체만으로 시혜가 될 수는 없으며 절대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은 자식에게 생명을 준 것은 맞지만 그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겠다는 욕망의 결과일 뿐 자식의 부탁에 따라 낳은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창조 행위는 자신의 선택에 수반되는 책임을 다 할 때만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사회에 적절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 없이는, 창조는 창조주의 이기적인 선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낳아줬다고 모든 비판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죠.


5.

<프랑켄슈타인>의 부제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으로 제우스의 명령을 받아 인간을 만들어낸 자입니다.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이에요. 그에게는 에피메테우스라는 동생이 있는데 동생의 이름은 ‘나중에 생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동생은 동물을 만들어냈어요. 에피메테우스는 창조된 생명들에게 하나씩 선물을 나눠줬는데, 이 ‘대책없는 동생’이 선물을 다 나눠줘버리는 바람에 마지막 차례인 인간에게 줄 것이 없게 돼버렸어요. (여담으로 에피메테우스의 부인이 그 유명한 판도라입니다. 참 민폐부부지요.) 그래서 인간은 사슴 같은 뿔도, 사자 같은 멋진 갈기와 강한 발톱도, 말 같은 튼튼한 다리도 못 받았죠. 인간을 사랑했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선물할 수 있도록 제우스에게 건의하였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아무런 선물도 없이 고통받는 인간을 보며 프로메테우스는 독단적으로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이 불을 통해서 인간은 다양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문명의 발전이 가능했어요. 신이 독점하고 있던 불을 인간이 갖게 되자 분노한 제우스가 벌을 내려,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인 채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프로메테우스 신화야말로 창조주가 가져야 할 윤리의식을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자기가 만든 생명체를 사랑하고, 그가 세상 속에서 잘 커나갈 수 있도록 창조 이후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 말이지요. 때로는 내가 만든 자식임에도 내 말을 듣지 않더라도, 결코 내가 사랑할 수 없는 모습을 갖고 있더라도, 내가 상상하지 못한 점들을 갖고 있더라도, 창조주는 피조물을 사랑해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채 세상에 던져진 피조물에게는 너무 잔인한 일일 테니까요.


차디찬 북극의 빙하 위에서 괴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짧은 삶을 살며 그가 어떤 고통 속에 빠져 있었을지 그려보면 가슴이 아려오네요. 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고통을 주진 않았을까 되돌아보게 되는 밤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에요. 오늘도 들어줘서 고마워요.


PS.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창조, 창조주를 증오하는 피조물 등의 모티프를 다룬 작품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양한 미디어믹스로 변주되기도 하고, 아예 다른 작품에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지요. 원작의 내부에 상상력의 빈틈이 있는 부분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를 채워넣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미디어믹스를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원작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비교하는 것도 정말 재미있으니, 원작을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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