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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을녀 Nov 23. 2019

가면 우울증 그리고...

피테르 브뤼헐에 대한 생각

몇 년 전 잠시 이슈가 되었던 단어가 있습니다.  너무 밝은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병. 증상도 없고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멀쩡한 병.
바로 가면 우울증입니다. 처음 이 단어를 접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이 갈 만한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모두가 괜찮아 보이지만 누구도 괜찮지 않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 생각나는 한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화가 피테르 브뤼헐입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의 이 화가는 최초의 농민화가로 불리는 사나이인데요. 평생을 농민들의 삶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김홍도처럼 한 시대를 대표했던 농민화가 피테르 브뤼헐입니다. 풍자와 해학을 가득 담은 이 화가의 그림은 유쾌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의 걸작이자 유작인  교수대 위의 까치입니다.  
그냥 보면 농민들이 춤을 추며 산을 오르는 그림입니다. 전혀 무서울 것이 없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까치의 의미를 알고 나면 이 그림은 완전 다르게 다가옵니다. 동양에서 까치는 길조를 의미하는 새여서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합니다. 반면에 서양에서 까치는 말 많은 감시자, 도둑 등의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브뤼헐이 그림을 그리던 이 시기는 마녀사냥이 유행처럼 번져 사람 하나쯤은 쉽게 화형으로 죽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우울한 티를 냈다가는 바로 마녀로 찍혀 불길 속의 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였을까요. 그는 아내에게 유언으로 이 그림을 제외한 모든 그림을 다 태워버리라고 했다 합니다. 혹시라도 남아있는 가족들이 "마녀"라는 이름로 묶여서 피해를 볼까 봐 걱정해서 그런 유언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과열경쟁이 심화된 우리네 사회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감시하고 부하직원이 상사를 평가하는 요즘, 힘든 것 우울한 것 등은 짐이 될 뿐입니다. 빠르게 숨겨서 웃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이기에 현대인의 인상은 항상 긍정적이고 밝아야 합니다. 더욱이 SNS가 대중화되면서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이 조차도 감시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회사용 계정과 진짜 내 계정을 만들어야 하는 모습에 씁쓸함은 더해집니다.


그 다음 그림은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입니다.  신화에 나오는 내용으로 신의 뜻을 거역하고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자만한 이카루스가 결국은 떨어져 사라져 버리는 그림입니다. 추락하는 순간 큰 빛이 번쩍하고  그 옆에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림은 이카루스처럼 자만하지 않고 신의 뜻에 따라서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상을 해내는 농부의 근검함, 성실함 등을 교훈으로 삼는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 그림은 다소 무섭습니다.  죽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은 아주 작아서 보이지 조차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죽음을 알아채고 도움 줄 법한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다들 자신의 일만을 합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환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신고를 하고 그를 도와야 했지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제가 신고를 하고 쭈뼛쭈볏하시던 몇 분의 도움으로
그분은 지하철에서 내려 응급실로 가실 수 있었습니다. 전화를 하고 그가 역에서 내리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이 사건을 겪으며  만약 내가 위급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아무도 나를 돕지 않겠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그림은 이런 종류의 개인화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이런 무관심과 개인화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이 그림 속의 농부 또한 누군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근면한 척, 성실한 척 일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던 시대였으니까요. 조금이라도 동요하면 이카루스와 같은 오만한 무리로 찍혀서 자신에게도 비슷한 일이 생길 테니 두려움을 성실함으로 숨겨야 했을 듯합니다.
 
그 시대의 그들처럼 지금의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1년에 한 번씩 강산이 바뀌는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에게 줄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나의 일로도 나는 충분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들이 sns와 언론에 유령처럼 떠도는 시대이기에 남을 돕는 일이 행동으로 나가기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브뤼헐의 그림에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농민의 춤이라는 그림입니다. 화려하고 즐거워야 할 파티에 누구도 진심으로 웃는 이 없습니다. 파티의 인물들의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화려하고 다채롭지만 편하게 웃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은 그림입니다.


위의 그림은 바벨탑이라는 그림인데 신의 경계를 어기고 높은 탑을 쌓았다가 결국에는 신에 의해서 사라져 버리는 탑입니다. 신화에 따라면 인간의 언어가 지역마다 다른 이유가 바로 이 바벨탑을 쌓은 것에 대한 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언어를 각 지역마다 다르게 해서 인간을 하나로 단합시키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덕분에 인간은 서로에 대해 무지해졌고, 서로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때로는 참 잔인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그림을 현대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목적도 없이 탑을 높게 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탑만 높이 쌓다가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더 높이 더 높이 만을 외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속 어떤 목적도 없이 경쟁만이 남아 서로를 공격하게 되는 슬픈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뤼헐의 그림 장님 우화입니다.  그림들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목적 없이 앞으로만 가다가 넘어져 버릴 것 같아서 아슬아슬한 요즘입니다.

이렇게 안쓰럽고 안타까운 요즘 과연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헬조선을 외치는 요즘 그럼에도 저는 이 각박한 사회에  한 가지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바로 아픈 사람들이 아프다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채찍질하고 일으켜 세우던 자기 계발서 대신 이대로도 충분히 좋다는 내용의 책들이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를 차지하고 있고 많은 공인들이 정신적인 질병이 있음을 인정하고 때로는 한동안 쉬는 것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루하루 벌어야 하는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결심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아픈 사람들이 아프다고 말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인 것 같습니다. 이미 아픈 사람들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은 절망을 노래하고 더 이상의 가망은 없다고 하지만 브뤼헐이 살았던 시대에도 어두운 중세가 지나고 새로운 봄이 왔듯이 대한민국에도 새로운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두꺼운 가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요즘,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봄이 오기 직전의 추위가 가장 춥듯이 지금의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대한민국이 오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바래보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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