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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을녀 Dec 22. 2019

혁신의 화가,마네

에두아르 마네

2010년대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1년만 더 있으면 우리는 202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더 빠르게 더 급속하게 변해가는 요즘입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한 기업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스티브 잡스입니다. 문자와 통화만 되던 핸드폰을 하나의 컴퓨터로 바꿔 버린 야망가!  한 가정에 한 컴퓨터를 떠나서 한 사람 앞에 한 개의 컴퓨터를 가지게 해 준 사람.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혁신적인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는 합니다. 틀 안이 아닌 틀 밖에 있던 것을 가지고 온 사람.


100년 뒤 미래에도 혁신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남자. 이렇게 혁신적인 스티븐 잡스 같은 사람이 미술사에도 있었습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이자 100년이 지난 지금조차 혁신적으로 평가받는 작품을 가진 화가. 에두아르 마네입니다.

마네하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그림은 바로 풀밭 위의 점심입니다. 각종 패러디와 광고계를 접수한 이 그림은 너무 익숙해서  뭐가 혁신적이다는 건지 설명이 필요한 듯합니다.


우선 기존의 미술의 모습과 마네의 그림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명작 우르비노스의 비너스입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여성은 전형적인 여신의 모습입니다. 누드의 아름다운 비너스가 관능적인 모습으로 누워있습니다. 그 옆에는 충직함을 상징하는 강아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도 각종 패러디와 광고로 유명한 그림인데요. 기존의 명작 우르비노스의 비너스와 같은 구조와 같은 배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느낌은 180% 다릅니다. 위의 그림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신화였다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다소 당돌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에서 도전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 대신 마르고 건조한 느낌을 주는 여자가 정면을 보는 그림. 자세히 보면 이 여성 몸을 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여성임을 나타내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에 두른 목걸이, 하녀가 보내온 꽃 그리고 구겨져있는 침대보 등에서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데요.
이 외에도 그림 오른쪽 하단에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림에는 하녀를 흑인으로 배치해서 인종의 계급에 대한 부분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보겠습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여인도 위의 여성과 같은 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야외에서 노골적으로 나체로 있습니다. 이 여성 또한 창피함도 없이 너무나 당당한 포즈로 앞을 응시합니다. 마치 그림 속의 남자가 아닌 관객을 응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밀레가 살던 시대의 여성은 신화의 여성처럼 아름답거나 순종적인 이미지였는데요. 마네의 그림 속 여성은 당당하고 능동적인 느낌을 줍니다.

언뜻 보면 당당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여자,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당당할까요? 그전에 누군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느낌이 드는 이 여자를 보면서 당당함을 넘어서 불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마 당시의 사회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백인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2가지 모습을 요구했습니다.


성욕을 채워주는 매춘부의 역할과 현모양처인 기존의 여성상 이렇게 2가지 모습을 모두 원했습니다.
덕분에 매춘은 유행처럼 성행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수동적이고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마네의 그림은 이런 사회와 지배계급의 이중성을 꼬집기 위해서 그린 그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무나 당당한 여성 왜 여성에게 어떤 역할을 강요하는 폭력을 행사하는지 묻는 것 같습니다. 이 시선이 당시의 남성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와 닿았을 것 같습니다. 백인 남성 중의 한 명인 마네가  기존의 여성의 이미지가 아닌 매춘부를 통해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했던 것! 마네가 살던 세상의 틀을 넘어선 행위이기에 그는 혁신적입니다.


이렇게 누드 여성의 그림으로 많은 사회적 반항을 일으킨 그의 다음 그림은 피리 부는 소년입니다.
이 그림도 그냥 보기에는 별 다를 것 없는 그림입니다. 단지 피리를 막 불기 시작하는 한 소년이 있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명작들과 비교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위의 그림 우르비노스의 비너스에서 보듯이 기존의 그림들에는 부드러운 명함 처리와 입체적은 느낌을 중요시 생각했습니다. 아카데믹한 기법으로 그린 그림들은 철저하게 계산되어서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림 속 소년에게는 명함과 입체적인 느낌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면적입니다.
신가한 것은 이런 평면성 안에서도 소년은 금방이라도 파리를 불 것 같이 생생합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단순한 배경, 심플하지만 강렬한 색채, 그리고 주체의 윤곽선을 명확하게 그리는 기법은 후대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인상파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그에게 가져다줍니다.


마지막 그림은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입니다
이 그림은 고야의 명작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를 모티브로 한 그림입니다.

두 그림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이 있습니다. 고야와 마네 모두 현실의 사건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고 모두 현실을 고발하는 느낌이 강한 그림입니다. 더욱이 누군가의 죽음 직전을 그렸다는 점에서 잔인한 그림일 수 있습니다. 고야의 그림은 마음속에서 뭔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지는 뜨거운 느낌입니다. 아주 격정적이며 동적입니다.


반면 마네의 그림은 매우 차갑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있는 가운데 한쪽 뒤에서 총을 들고 있는 남자가 보입니다. 피리 부는 소년에 나오는 단순하고 강렬한 색채 분명한 윤곽선이 잘 드러납니다.
마네는 누군가 죽는 순간의 모습을 냉정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그림은 냉정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 차가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1864년 멕시코를 점령한 프랑스는 멕시코를 지배하기 위해 젊은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보냅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내전에 프랑스의 군대는  막시밀리안 대공만을 남겨둔 채로 본국인 프랑스로 떠나버립니다. 이렇게 혼자가 된 허울만 좋은 막시밀리안은 결국 멕시코의 군인들에게 총살당합니다. 현실세계에서 멕시코인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황제, 그림 속에는 총을 쏘는 사람들이 프랑스의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왜 마네는 프랑스인에 의해 사형당하는 황제를 그렸던 걸까요?

아마도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진짜로 오스트리아의 대공을 죽인 이 들은 프랑스인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이 하나를 국익에 맞게 이용하다가 필요 없어지니 가차 없이 버리는 그들의 비정함에 대한 정치적인 비난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본인만의 회화 방식과 시대의 위선을 꼬집은 화가 마네는 비난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배계급들에게 마네의 비판은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그는 가장 혁신적인 화가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남아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앞으로의 미술사에도 혁신성의 상징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상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마네와 그의 시선에 대한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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