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문화부 기자일을 하며 3년여 쓴 책 '재미의 발견'이 곧 출간됩니다. 책의 일부를 출간 전 공개합니다. 프롤로그(1)부터 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습니다.
장르란 학자마다, 사람마다 그 정의가 제각기 다른 용어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장르만큼 쉬운 것도 없습니다. 심플, 모던, 클래식, 엔틱, 북유럽… 콘텐츠가 집이라면 장르란 집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입니다. 크리에이터는 스토리라는 재료를 이용해 플롯이라는 뼈대를 세우고, 장르라는 인테리어를 합니다.
장르 영화의 인테리어들을 살펴봅시다. 액션 영화에서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장인물의 행동양식은 액션입니다. 전반적인 사운드는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 박진감 넘치는 음악입니다. 스릴러 영화의 톤은 로우키입니다. 등장인물의 주요 행동양식은 끊임없는 ‘의심’이지요. 데이비드 파킨슨에 따르면, 필름 누아르의 인테리어는 명암의 극적인 대비, 갈피를 잡기 힘든 미장센, 경사 앵글, 회고적인 보이스오버의 사용, 예민한 부르주아, 냉소적인 탐정, 무자비한 사기꾼, 부패한 관료, 기회주의적인 떠돌이, 도망자 커플, 팜므파탈, 성·계층·정체성·불평등·배반·편견·폭력 등입니다. 책 『영화 장르의 이해』의 저자 정영권은 전투 영화의 도상이 군복, 철모, 소총과 기관총, 탱크, 전투기, 군함, 항공모함 등으로 채워져 있으며 “소규모 부대를 주요 무대로 아버지 격의 장교나 부사관의 지휘하에 미숙한 소년이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진정한 남자가 되는 이야기, 부대 내의 갈등이 적과의 싸움이라는 국가적 대의 속에서 봉합되는 이야기가 전형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공포 영화, 판타지 영화, SF 영화, 로맨스 영화의 인테리어는 대강 떠오르실 겁니다.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는 장르에 정통한 사람이고 그것을 깨는 재미에 들린 사람입니다. <무한도전> 자체가 ‘도전’(Challenge)이라는 장르의 파괴였습니다. 여섯 명의 코미디언이 계속해서 뭔가에 도전하는 것이 <무한도전>의 중심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Infinite challenge’(무한한 도전)라는 영어 이름처럼 <무한도전>은 역사X힙합 프로젝트, LA 프로젝트, 런웨이 프로젝트, 릴레이툰 프로젝트 등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도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한도전>은 이렇게 ‘무언가에 도전하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도전 장르의 인테리어 스타일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김태호 PD는 ‘도전’이라고 적힌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방안의 가구들을 전부 삐뚤빼뚤하게, 우스꽝스럽게 그 배치를 바꿔버렸습니다. 가령 일반적인 도전 장르에서는 등장인물이 성공할 확률이 1%라도 존재합니다. 그 도전이 미션임파서블 수준이더라도 말입니다. 이에 더해 시청자로 하여금 그 도전의 성공 가능성에 은근히 기대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전’이라는 장르가 ‘보통’ 풍기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무한도전>의 도전은 2005년 ‘무모한 도전’이라는 초창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도전의 성공 확률이 0을 넘어 마이너스로 보였습니다. <무한도전>에서 도전이란 ‘목욕탕 배수구보다 물 빨리 빼기’처럼 불가능에 가까운데다가 등장인물들은 ‘대한민국 평균 이하’라는 콘셉트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는 어떤 도전이든 성공에 대한 기대감은 없었습니다. 분명히 장르는 ‘도전’인데, 희한하게도 시청자는 등장인물이 어떻게 실패할지를 기대했습니다.
초창기 <무한도전>은 언제 종영될지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멤버들과 스텝들은 <무한도전>이 올해도 폐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념하면서 신기해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한도전>은 이제껏 없던 문법의 ‘도전’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입니다. <무한도전>이 나오기 전까지 도전이라는 장르는 늘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갖춘 멤버들의 성공 가능성 있는 도전기였습니다. 단적으로 <출발 드림팀>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진(드림팀)은 장애물을 뛰어넘어 누구보다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도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항상 ‘평균 이상’인 누군가는 승리하고, 성취하고, 더 높은 경지에 도전했습니다. 비록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이들의 실패는 실패라기보다는 ‘아까운 실패’였습니다. 즉, 성공에 가까웠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두 박수를 받았습니다. 퀴즈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은 어떻습니까. ‘평균 이상’의 학생들이 가려지고 이들이 50번 문제를 풀기 위해 도전하고, 경쟁하고, 성취합니다. 이러한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이 모여 ‘도전’이라는 장르의 통상적인 인테리어를 형성했는데 <무한도전>이 그것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입니다.
물론 <무한도전> 멤버들도 가끔 성공했습니다. 성공할 때면 정형돈이 “잘했어! 우리가 봤어!” 하고 대성통곡을 했지요. 그러나 그동안의 숱한 실패 속에서 이러한 성공은 특이점이 될 정도로 드문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무한도전>은 다양한 장르가 포함된 리얼 버라이어티인 만큼, ‘도전’이라는 장르만 깨부순 것이 아닙니다. 가령 <무한도전>의 팬이라면 특집 <못생긴 친구를 소개합니다>를 기억할 겁니다. 이 특집에서 출연자는 더 못생겼다고 여겨질수록 더 높이 올라갑니다. 더 잘난 사람을 뽑는 미인대회 장르의 클리셰를 부순 것입니다. ‘무한도전 가요제’는 어떠합니까. 일반적인 가요제는 실력 있는 가수들의 프로페셔널한 무대입니다. 그러나 <무한도전>의 가요제에서는 무대에 오르기만 해도 환호성이 터지는 쟁쟁한 가수들이 무대에 오르기만 해도 웃음을 만드는 멤버들과 함께했습니다. 이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멋지면서 동시에 우스운 노래를 부르는 순간 시청자는 웃어야 할지 감탄해야 할지 모르게 됐습니다. 유능한 형사와 지능적인 범인이 박진감 넘치는 쫓고 쫓김을 선보이는 영화나 드라마의 추격전과 달리 예능에서 처음 시도된 <무한도전>의 추격전은 너무나 허술했기에 시청자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게스트를 존중하는 진지한 이야기로 채워지던 토크쇼는 게스트를 놀리는 자리가 됐습니다. 김태호 PD는 이런 식으로 비단 ‘도전’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뿌리를 흔들었습니다. “이 장르는 보통 이래~”에서 그 ‘보통’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것입니다.
한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역시 장르적 문법에서 벗어남으로써 당혹과 집중을 만들어냅니다. 놀란 감독은 영화 <덩케르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영화가 중시한 것은 잔혹한 묘사를 최소화해서 관객이 공포감에 눈을 돌리지 않고 스크린에 계속 몰입돼 서스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전쟁 영화는 ‘보통’ 잔인하고 참혹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전쟁 영화의 인테리어입니다. 하지만 <덩케르크>에는 잔혹한 장면이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과 무언가가 불에 타는 장면이 보이고, 멀지 않은 곳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 전투기가 날아가는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입니다. 즉, 놀란은 “전쟁 영화 장르는 보통 이래~”의 ‘보통’에서 멀리 벗어나 당혹감과 집중을 만든 것입니다. 놀란 역시 김태호와 마찬가지로 장르에 정통하며 장르에서 벗어난 특이(特異)의 효과를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