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드라마가 '명작'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 알까요? 에미상 수상작을 통해 명작의 공통점 한 가지를 풀어봤습니다. (곧 출간되는 책 '재미의 발견'에 수록된 글입니다. 글에 담긴 드라마는 모두 현재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미국 방송계 최고의 영예인 에미상을 수상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와 <브레이킹 배드>, 그리고 <덱스터>를 명품으로 만든 것은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의 특이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세 드라마의 주인공 모두 선인인지 악인인지 구분하기가 모호한 캐릭터이고, 그러한 캐릭터는 ‘보통’ 콘텐츠들에서 쉽게 볼 수 없습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정치인 프랭크 언더우드와 그의 아내 클레어 언더우드는 소시오패스 정치인입니다. 이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요.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별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때문에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비정한 정치판에서조차 두 사람의 적수는 없습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
그런데 드라마에서 두 사람은 마냥 악인으로 비치지만은 않습니다. 악인이 날뛰는 공간이 다른 곳이 아닌 정치판이기 때문입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며 서로가 서로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악을 쓰는 정치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승리는 그 자체로 미덕입니다. 정치에 있어서 승리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지지자의 마음을 얻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언더우드 부부는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시오패스라는 점에서 ‘악’이지만 그들의 승리는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온다는 점에서 ‘선’일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들은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셈입니다. 실제로 드라마에서 그들은 권모술수로 정적들을 쓰러뜨려 가는 동시에 다수의 마음을 얻고, 또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청자들은 냉혈한인 두 사람을 욕하다가도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는 주인공 부부를 응원하게 되죠. 우리가 정치인들을 욕하면서도 선거철마다 표를 던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치판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니까요.
브레이킹 베드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것은 <브레이킹 베드>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화학 교사 월터는 빚에 쪼들리고, 설상가상으로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습니다. 그동안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병원비까지 남기고 간다고 생각한 월터는 가족에게 돈이라도 남기고 죽기 위해 마약 제조 및 판매에 뛰어들게 되는데요. 암흑세계와 엮일수록 문제가 발생하고, 어찌어찌해서 마약왕까지 돼버리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어느 누구보다 윤리적이었던 이 화학 교사는 영리하고 냉정한 악당으로 변모합니다. 경찰이나 갱단에 잡히지 않는 것이 곧 가족을 위한 일이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월터는 자신의 행동에 큰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생전 처음으로 자유롭게 살아보는 데서 오는 희열을 즐기는 이중적인 상태가 됩니다. 시청자는 이런 월터를 응원해야 할지 비난해야 할지 쉽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캐릭터 설정은 <덱스터>에서도 이어집니다. 주인공 덱스터는 원칙에 따라 살인마만 골라 죽이는, 소위 ‘착한 살인’(?)만 하는 사이코패스 법의학자입니다. 살인은 그 자체로 악이지만 이 악이 살인마를 처단하는 선한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 덱스터가 악인이냐 선인이냐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덱스터
이렇게 선과 악이 모호한 캐릭터 설정은 특이(特異)합니다. 완벽한 선이나 완전한 악으로 치우치는 캐릭터는 만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과 악 사이에서 모호한 캐릭터를 만드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명작이라고 불리는 드라마에는 굉장히 다층적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조금 과장하면 그래서 명작 칭호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대다수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선과 악, 두 갈래 길에서 명확히 선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가끔 극 중 선과 악이 모호한 캐릭터가 등장하면 조연이더라도 높은 인기를 얻습니다.
또한, 선과 악이 모호한 캐릭터 설정은 그 자체로 특이할 뿐 아니라 현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핍진성이 높을수록 주목받습니다. 콘텐츠가 현실과 닮아있어야 시청자는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우리 인간은 선이나 악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한편, 선과 악의 경계를 훌륭하게 표현한 드라마가 있어 추천합니다. 미드 <빌리언스>입니다. 이 드라마는 모든 등장인물이 선과 악의 경계를 마치 능숙한 광대가 외줄을 타듯 넘나듭니다. 이 사람이 착한가? 하다가도 아닌가? 갸우뚱하게 되지요. 금융 관련 지식을 어느 정도 알아야 편하게 볼 수 있어 다소 진입장벽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의 매력 덕분에 호평받고 있습니다.
빌리언스
십 년 동안 아홉 개 시즌이 나온 인기 미드 <슈츠> 역시 추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지요. <슈츠>의 주인공 마이크 로스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했다고 사기를 치고 변호사 자격도 없이 뉴욕에서 가장 큰 로펌 ‘피어슨 하드먼’에 취직합니다. 로스는 가짜 변호사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부도덕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지만 변호사로서는 정의롭습니다. 선과 악이 모호한 것은 로스뿐만이 아닙니다. 피어슨 하드먼의 변호사들 역시 철저히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비정한 법조 활동을 하는 한편, 정의로운 마이크 로스로 인해 때때로 양심을 지키는 선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시즌이 넘어갈수록 정의로웠던 몇몇 변호사들이 로스의 거짓말을 감춰주기 위해 정의를 포기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슈츠>는 로스를 중심으로 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의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슈츠
마지막으로 김희애·유아인 주연의 드라마 <밀회> 역시 탁월하게 그 경계선을 탑니다. 김희애와 유아인은 오염된 세상 속 순수함을 상징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명백한 불륜이기에 지탄받습니다. 반면 악역인 듯 보였던 조연들의 입장은 한편으로 시청자의 공감을 삽니다.
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