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문화부 기자일을 하며 3년여 쓴 책 '재미의 발견'이 곧 출간됩니다. 어떤 콘텐츠가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해, 재미를 만드는 핵심 원리를 밝히는 내용을 책에 담았습니다. 책의 일부를 출간 전 공개합니다.
[특이한 ‘맛’이 있다]
맛에는 단맛, 신맛, 짠맛, 쓴맛에 더해 감칠맛이 있습니다. 감칠맛은 기본적인 네 가지 맛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인데요. 맛있는 음식에는 반드시 존재하는 맛입니다. 단맛은 설탕, 신맛은 레몬, 짠맛은 소금, 쓴맛은 자몽이나 커피 등에서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칠맛은 다른 맛과 달리 번거롭고 까다로운 가공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음식에서 다른 맛보다 감칠맛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감칠맛이 나는 이유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물질 중 하나인 ‘유리 글루탐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떤 단백질이든 유리 글루탐산이 그 단백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삶아 낸 우리나라의 육수, 일본의 ‘다시’와 가츠오부시, 서양의 스톡, 콩 단백질을 분해한 간장, 우유 단백질로 만드는 치즈 등이 감칠맛을 추출하려는 인류의 노력이었습니다.
특이의 관점에서 보면, 감칠맛은 ‘보통’ 맛에서 벗어난 맛입니다. 콘텐츠의 특이점이 사람을 당황하고 집중하게 하듯, 감칠맛 있는 음식이 앞에 있으면 사람들은 말을 적게 하고 입안에 음식을 집어넣기 바쁩니다. ‘음!’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음식에 최대한 많은 감칠맛(특이)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맛의 고장 전라도에서는 “감칠맛이 난다”를 “개미지다”로, ‘재미있다’를 ‘재미지다’라고 표현합니다. ‘재미지다’와 ‘개미지다’. 어쩐지 닮지 않았나요? 둘 다 ‘특이’가 담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맛의 대부 백종원이 등판합니다. 백종원은 <골목식당>에서 요리를 먹어보고 가끔 “재미있네?” “음, 여기 재미있는데?”라고 말합니다. “맛이 별로일 때 이런 말을 쓰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백종원은 “진짜 맛있을 때도 재미있다고 한다. 다만 다른 곳과 조금 다를 때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백종원은 무엇이 개미 있는지 뿐만 아니라 무엇이 재미있는지를, 즉 특이(特異)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지만, 드라마 장르에도 '감칠맛'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습니다.
[막장, 욕하면서도 계속 보는 이유]
막장(갱도의 막다른 곳)과 드라마의 합성어, 막장드라마.
막장드라마는 정의내리기가 퍽 쉽습니다. 어떤 드라마를 볼 때, 입에서 욕이 나온다면 그 드라마는 막장드라마입니다. “진짜 막장이다. 막장.” 이런 욕 말입니다. 이런 욕이 나오는 이유는 막장드라마의 소재가 불륜이나 불효, 폭력, 범죄, 출생의 비밀, 말도 안 되는 사건 등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극단적인 특이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특이점인 이유는 싸움구경이나 불구경과 그 논리가 같습니다. 즉, 막장 소재는 우리 인생에서든 콘텐츠에서든 ‘보통’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입니다.
혹자는 막장드라마를 ‘개연성이 없는 드라마’라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개연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막장드라마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막장드라마는 철저하게 논리적이며 개연성을 갖추고 있는 반면 어떤 막장드라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막장이냐 아니냐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저 드라마의 소재가 막장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높은 시청률로 화제가 됐던 드라마들은 대부분 막장이라고 부를 만한 소재가 있습니다. 가령 <부부의 세계>와 <펜트하우스>처럼요. 방송국에서 욕을 먹으면서까지 계속해서 막장드라마를 제작하는 이유입니다. 막장이 흥행을 보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계속 막장 소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드라마의 부실한 퀄리티를 막장 소재가 압도한 드라마들도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대표적인 막장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은 개연성도 없고 막 찍었다는 비판이 많았고, <개그콘서트>와 같은 시간대에 방영했음에도 마니아층이 탄탄했죠. 1999년부터 2014년까지 방영한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웬만한 요즘 드라마들보다 높았습니다. 막장드라마에 담긴 극한의 특이점이 시청자의 입에서 욕이 나오게 하는 한편 극도의 당혹감과 집중을 유도해 다음 장면을, 그리고 다음 화를 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막장드라마를 하나의 ‘장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막장드라마가 흔한 우리나라에는 막장드라마를 쓰는 작가들 역시 많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극한의 특이점을 만드는 막장드라마 작가들은 어쩐지 경쟁적으로 다른 작가들보다 더 독특한 막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막장드라마 작가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막장을 구사했던 작가로는 단연 임성한 작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압구정 백야>, <오로라 공주>, <신기생뎐>, <하늘이시여>, <인어아가씨>, <보고 또 보고>, <보석비빔밥>, <아현동 마님> 등이 그가 쓴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막장드라마 중에서도 특이했는데요. “암세포도 생명”이라며 항암치료를 포기하는 스토리는 압권입니다. 귀신에 빙의해 투시능력을 발휘하고, 웃다가 죽습니다. 한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 열두 명이 죽어서 하차합니다. 심지어 어떤 등장인물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옵니다. 시청자는 욕을 해댔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작품이 아주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임성한 작가는 2015년 은퇴를 선언했고, 그 뒤로 나온 막장드라마들은 그가 만들어낸 막장의 독특함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임 작가는 2021년 1월 <결혼작사 이혼작곡>이라는 작품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중간은 없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누군가는 욕을 했겠지만 욕하는 그 누군가도 임 작가가 그린 특이점에서 채널을 돌리기 어려웠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