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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Feb 07. 2021

‘오글거리는’ 김은숙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 (13)

*제가 문화부 기자일을 하며 3년여 쓴 책 '재미의 발견'이 곧 출간됩니다. 어떤 콘텐츠가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 핵심 원리를 밝히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책의 일부를 출간 전 공개합니다. 프롤로그(1)부터 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습니다. 



“러브가 무엇이오?” 

“그걸 왜 묻는 거요?”

“하고 싶어 그러오. 벼슬보다 좋은 거라 하더이다.”     

 

2018년 인기 드라마였던 tvN의 <미스터 선샤인>(극본 김은숙) 속 대사입니다. 이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글거리는 대사들 덕에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두 주인공은 순간적으로 경계를 넘어 훅, 사랑이라는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한 드라마 안에서 키스신은 몇 번이나 될까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통 한 드라마를 통틀어서 키스신은 많아야 두세 번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드라마 한 회 분량의 전개에서 키스신이 일어나는 빈도는 평균적으로 몇 번일까요? 보통은 0에 근접할 것입니다.      


화끈거리는 키스신을 상상해봅시다. 매력적인 두 주인공의 입술이 포개집니다. 오글거리는 손가락만큼,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수만큼 시청률도 상승합니다. 드라마에서 키스신이 나왔다 하면 ‘키스신에 최고 시청률 경신’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지지요.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키스신이라는 극 중 최고의 특이점을 보기 위해 드라마를 끊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드라마 플롯은 대부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뤄내는 플롯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에서 지상의 과제는 사랑입니다. 키스신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던 모든 갈등 요소를 일순간에 끝내버리는 마침표 역할을 하며, 드라마의 최종 목표인 사랑을 완성합니다.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선샤인>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웬 키스신이냐,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은숙의 작품이 인기 있는 이유가 바로 키스신처럼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글거리는 대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에서 김은숙은 독보적입니다. 그는 어떤 작가보다 이런 부류의 대사를 많이 사용합니다.      


“내 방금 아주 중요한 결정을 했어. 자네에게 내가 누군지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자리를 줄까 해. 정태을 경위. 내가 자넬 내 황후로 맞이하겠다. 방금 자네가 그 이유가 됐어. 이 세계에 내가 발이 묶일 이유.” (<더 킹: 영원의 군주>)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드라마 <도깨비> 中)      


“오전이랑 오후랑 진짜 다르네.”

“제가 오전이랑 오후랑 어떻게 다른데요?”

“오전엔 되게 이쁘고, 오후엔 겁나 예쁘죠.” (드라마 <태양의 후예> 中)     


“애기야 가자.” 

“이 안에 너 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 中)     


“길라임 씨는 몇 살 때부터 그렇게 예뻤나?” (드라마 <시크릿 가든> 中)     


우리는 보통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느끼한 말을 어떤 사람이 했을 때, 그 말에 찌릿찌릿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그라듭니다.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를 떠올려도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라는 대사를 절친한 친구에게서 듣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아마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겠지만요. 자, 레드 썬!        


듣는 순간 잠시 멍~ 하고 닭살이 돋았다가, “오글거려!”라고 말하겠지요. 멍~해진 이유는 현재의식이 잠시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키스신과 마찬가지로 오글거리는 대사는 특이(特異)합니다. 콘텐츠 속 역할도 굉장히 유사합니다. 느닷없는 두 주인공의 키스신처럼, 오글거리는 말은 그 말이 고막에 닿은 상대방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하고, 관계를 급진전시킵니다.      


그런데 드라마 한 회 분량의 대사에서 오글거리는 대사가 나오는 횟수는 평균적으로 몇 번일까요? 다른 드라마에서는 키스신과 마찬가지로 보통 0에 근접하겠지만, 김은숙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아닙니다. 김은숙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유난히 많은 오글거리는 대사에 마치 키스신을 여러 번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김은숙 드라마가 보통의 다른 드라마들과 다른 점, 즉 특이점입니다. 특이점(오글거리는 대사)이 많은 것이 김은숙 드라마의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오글거리는 잦은 ‘간접 키스신’들로 인해 다른 드라마보다 더 집중도가 높게 되고, 그래서 다른 드라마보다 시청률이 높은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 오글거리는 것이 그렇게 좋으면 왜 다른 작가들은 이 오글거림을 잘 사용하지 않을까요. 잘 사용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쉽게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글거림이 자칫하면 드라마를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콘텐츠는 실제 세상과 닮을수록 더 많은 시청자를 몰입하게 합니다. 그 닮은 점이 시청자와 콘텐츠 사이 연결고리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전문용어로 ‘핍진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오글거리는 대사는 자칫 드라마의 핍진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하지 않을 말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면 그 드라마와 시청자 사이의 연결고리는 느슨해집니다.      


그런데 김은숙은 오글거림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데 도가 튼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오글거림이 ‘그럴 만해’라고 인식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전문가입니다. 김은숙은 특수한 환경에서는 오글거리는 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특수한 환경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특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김은숙이 오글거림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김은숙의 드라마에서 오글거리는 말을 사용하는 캐릭터들을 살펴봅시다. 전부 일반인이 범접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거나, 능력이 특출나거나, 돈이 많고, 외모가 빼어난, 마치 절반은 신처럼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도깨비>의 주인공 김신(공유)과 저승사자(이동욱)는 실제로 사람이 아니기도 하지요.      


<미스터 선샤인>에서 이병헌은 일제강점기 조선 반도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쉽사리 건들지 못했던 미합중국 영사대리였습니다. 노비 출신에 능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과 <시크릿 가든>의 현빈은 지적 능력, 외모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재벌이고요.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 이민호는 키 187에 잘생기고 돈 많고 지적, 신체적 능력까지 출중한, 백마 타고 차원을 넘어온 대한제국의 황제입니다.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 역시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신화적인 영웅입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이나 재력, 외모에도 불구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지고지순하며, 한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된 로맨티스트라는 것입니다. 모두 이 세상에는 존재할 리 없는, 딴 세상에 있을 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딴 세상’은 우리가 잘 모르는 세상이며, 그 세상에서는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사용할 법하기에 그들이 어떤 오글거리는 말을 하더라도 시청자들은 이를 용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법칙은 ‘이룰 수 없는 녹진한 사랑이 중심이 되는 플롯’입니다. 김은숙의 드라마는 늘 녹차라테만큼 녹진한 사랑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오글거리는 말을 하는 주인공들은 항상 사랑의 열병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있는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그 열병은 더 심해집니다.      


아플 정도로 강렬한 사랑을 해봤다면 그 사랑이 사람을 무모하게 만들고 겁 없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게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김은숙은 아주 녹진한 사랑을 통해 등장인물들이 오글거리는 말을 하더라도 “사랑하니까”라고 용인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김은숙 작가의 모든 작품에 해당하는 법칙은 아니지만, 마지막 법칙은 ‘생과 사가 긴밀히 함께하는 세계관 설정’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는 말이 있듯, 안 하던 말도 하게 됩니다. 가령 <도깨비>에는 죽고자 하는 도깨비와 끝없는 죽음과 함께하는 저승사자가 등장합니다. <태양의 후예>는 긴박한 전쟁 지역을, <미스터 선샤인>은 죽음이 흔했던 일제강점기를 세계관으로 설정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세계관, 그래서 “오글거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이 세계관에서는 그래”라는 변명이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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