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문화부 기자일을 하며 3년여 쓴 책 '재미의 발견'이 곧 출간됩니다. 어떤 콘텐츠가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해, 재미를 만드는 핵심 원리를 밝히는 내용을 책에 담았습니다. 책의 일부를 출간 전 공개합니다.
지금이야 예술을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학습의 대상이나 교양 정도로 치부하지만 TV나 인터넷,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던 과거에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요즘 유튜브를 보는 것과 같은 재미 추구 행위였습니다.
예술은 늘 특·전·격을 지향해야 합니다. 특·전·격의 효과인 집중의 다른 말은 곧 감상이고, 예술은 감상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예술은 어떤 것이 감상을 유발한다면 곧 그것이 예술이라고,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예술을 정의합니다. 예컨대 마르셀 뒤샹이 한 상점에서 구매해 예술 작품으로 발표한 소변기(마르셀 뒤샹의 ‘샘’)는 감상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었습니다. 화장실에 있어야 할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보통’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었고, 대중의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화장실에 있는 소변기가 배설을 이끌어내는 것과 달리 ‘샘’은 특이와 전의였기에 당혹과 집중을 이끌어냈습니다.
인류가 문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된 후 생겨난 예술은 시와 소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영업비밀 역시 줄곧 특·전·격였습니다. 이들 역시 대중이 그들의 예술을 감상하게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은유에는 아재개그나 힙합의 펀치라인과 마찬가지로 전의(轉意)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즉, 은유는 무언가에 대한 생각의 변화, 의미 변화를 이끌어내 독자를 당혹하고 집중하게 합니다.
은유에 대해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들은 대부분 은유의 앞 글자 ‘은’을 따서 “은유란 ~은 ~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생은 여행이다”가 바로 은유라고 가르치는 식입니다. 직관적이기도 하고, 어떤 설명보다 쉬운 설명입니다.
지금 앞에 있는 사물을 은유법으로 표현해봅시다. 제 경우에는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이 책의 원고와 라테 한 잔이 있습니다.
“글은 라테다.”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아마 “왜 글이 라테지?”라며 미약하지만 당황했고, 또 집중했을 겁니다. 글에서 라테로 의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배웠던 시에는 “인생은 나그네길” “내 마음은 호수” “오월은 계절의 여왕” “침묵은 금” 등의 은유가 있지요. 인생이 나그넷길로 변하고, 마음은 호수로 변하고,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 되며, 침묵은 금이 됩니다.
이러한 은유에 그다지 당황하거나 집중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아재개그가 그리 당황스럽지 않은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의미 변화를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이 접해왔기에 더 이상 큰 폭의 전의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