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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Feb 18. 2021

자연=인간, 녹색동물의 은유

*제가 문화부 기자일을 하며 3년여 쓴 책 '재미의 발견'이 곧 출간됩니다. 어떤 콘텐츠가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해, 재미를 만드는 핵심 원리를 밝히는 내용을 책에 담았습니다. 책의 일부를 출간 전 공개합니다. 



식물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언젠가 한 번쯤은 본 적 있을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식물들이 마치 동물처럼 움직이는 모습을요. 자연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게 뭐가 재미있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연다큐멘터리는 의외로 시청률도 꽤 높고, 세계적으로 방송사들 사이에서 거래가 잘 이뤄집니다.     


사람들이 자연다큐멘터리에 끌리는 이유는 바로 자연다큐멘터리가 인간세계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연다큐멘터리는 시청자들이 자연=인간세계라고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즉 시청자의 마음속에서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시청률이 높은 것입니다.      


자연다큐멘터리 하나를 떠올려봅시다. 자연다큐멘터리는 초고속 카메라를 이용해 식물의 미세한 동작을 아주 정밀하게 포착해냅니다. 그리고 그러한 포착의 결과, 놀랍게도 식물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마치 동물처럼 움직입니다. 자연다큐멘터리에서 식물은 말 그대로 ‘녹색의 동물’이 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고요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던 자연은 묘하게 인간 세상과 닮아갑니다. 식물들은 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광합성을 위해 다른 식물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용을 씁니다. 어떤 식물은 햇빛을 찾아 높이 올라가기보다는 다른 식물에 기생해 살아갑니다. 어떤 식물은 살기 위해 다른 식물을 말려 죽이고, 어떤 식물은 곤충을 속여서 함정에 빠뜨리고 잡아먹습니다.    

  

땅 위에서만 인간 세상과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땅속에서도 식물들은 더 많은 영양분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식물의 뿌리는 식물이 땅 위에서 확보한 영역보다 몇 배는 더 큰 영역을 땅속에서 확보하고 있으며, 서로 얽히고설키며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식물을 찍었을 뿐인데 묘하게 인간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 경쟁하고, 더 갖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생존을 위해 기생하고, 사기를 치는 등 범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살아가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스크린에는 온통 녹색과 흙색밖에 없는데 말이지요. 이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곰이 웅녀가 된 것만큼 당혹스러운 사건일 수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 대한 강력한 메타포, 강렬한 전의(轉意)가 빛을 발해 당혹과 집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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