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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Mar 18. 2021

천만 관객 영화들의 ‘뻔한’ 플롯

'재미의 발견' 출간 전 선공개

“박찬욱, 봉준호 감독 같은 유명 감독이 아닌 감독들은 거대 자본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림이나 소설, 웹툰처럼 물감과 붓, 혹은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뚝딱 만들어지는 콘텐츠가 아닙니다. 영화는 가장 많은 인력과 돈이 들어가는 예술입니다. 다양한 이권이 엮여있기에 영화, 특히 상업영화는 콘텐츠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수적이라 함은, 모두의 돈을 위해 가장 실패하지 않을 방향, 손해를 보지 않을 방향으로 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여기서 클리셰가 생깁니다.   


만약 당신이 100억 원을 투자한 영화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유명하지도 않은 감독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든답시고 증명되지 않은 특이한 플롯과 캐릭터 설정 등을 시도한다고 해봅시다. 당신이 100억 정도를 하찮게 볼 부자가 아니라면 모 아니면 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감독의 이러한 행태를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영화가 제작비도 못 건진다면 당신의 100억은 온전히 날아가는 셈이니까요. 반면, 만약 당신이 10만원을 투자한 영화가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했을 때 당신은 오히려 그 시도를 반길지도 모릅니다. 잃어도 그만인 돈이니까 안전보다는 위험을 선호하겠지요. 그러나 펀드가 아닌 이상 10만원을 투자할 수 있는 영화는 없습니다. 투자금은 통상적으로 적어도 1,000만원 이상입니다.   


보수적인 영화의 캐릭터 설정과 플롯이 어떠한지는 천만 관객을 돌파한 상업영화들의 공통점을 분석하면 알 수 있습니다. 외양만 다를 뿐 천편일률적인 플롯을 차용한 영화들이기 때문입니다. 공통점을 세 단어로 표현하면 하자(瑕疵, ‘흠’을 이르는 말)와 고난, 구원(Redemption : 한 인간을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입니다. 이 영화들에서 하자 혹은 결점이 있는 주인공은 그 하자나 결점과 맞물린 끝을 모르는 고난에 빠져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상황에 처하고, 그 고난을 극복하거나 견뎌 내는 과정에서 고통과 죄악에서 벗어납니다. 


굳이 플롯으로 구분한다면 구원(Redemption) 플롯입니다. 이 플롯에서 격변은 크게 두 번 일어납니다. 주인공이 하자와 맞물린 끝없는 고난에 빠져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격변과 그 고난을 극복하거나 견뎌내는 과정에서 구원받는 격변입니다. 이는 한국에서 소위 먹히는 플롯, 먹히는 캐릭터 설정입니다. 상업 영화들은 정말 예외 없이 이러한 구조로 제작됩니다. 이러한 구조가 줄곧 흥행보증수표였기 때문입니다.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쫓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명량>에서 이순신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자로 느껴지는 소위 ‘백성 바보’입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의종군에서 복귀한 그는 피를 토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밤을 새워 전쟁을 준비합니다. 육군으로 복귀하라는 어명도 거부하고 오로지 백성을 위해 자발적인 고난에 처합니다. 한 부하는 도망치지 않는 이순신의 암살을 도모하며 거북선에 불을 지르고 설상가상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일본군이 들이닥치지만, 이순신은 결국 열두 척의 배로 300여 척의 배와 맞서 백성을 구해내고 성웅으로 추앙을 받습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막순이도 찾았고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국제시장>은 어떻습니까. 선장이 꿈이었던 ‘가족 바보’ 황정민은 꿈에 그리던 해양대에 합격하지만,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지나친 책임감 때문에 독일 탄광으로 떠나고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일평생 자발적인 고난에 처합니다. 수십 년이 흘러 꿈을 이루기는커녕 툭하면 화를 내는 무력한 노인이 돼버렸지만, 그는 희생으로 지켜낸 단란한 가족과 급성장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며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7번방의 선물>에서 여섯 살 지능에 ‘딸 바보’인 류승룡은 딸에게 세일러문 가방을 사주려다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폭행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결국 딸과 만나고 재심의 기회도 얻지만, 딸을 살리고자 거짓 자백을 하며 재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아빠를 용서하겠습니다.” 이후 변호사가 된 딸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깁니다.  


“내가 뭣 때문에 죽기 살기로 뛰어다녔는데?”

“내 핑계 대지 마.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 했어?”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가족 바보’ 장동건은 <국제시장>의 황정민과 마찬가지로 가족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이 결점이라면 결점이었습니다. 부인이 죽고 동생을 잃어버리는 등의 고난은 그의 강한 책임감과 맞물렸고, 그는 죄책감과 분노로 미쳐버립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는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을 구해내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아빠, 아빠는 왜 자기 생각만 해요? 그래서 엄마가 떠난 거잖아요.”

<부산행>에서 비정한 펀드매니저 공유는 갑작스러운 ‘좀비 대란’에 처합니다. <7번 방의 선물>의 류승룡과 마찬가지로 ‘딸 바보’인 그는 인정 많은 딸로 인해 안 하던 일들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끊임없는 고난에 처합니다. 그리고 결국 딸을 위해 희생하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죄악에서 벗어납니다. 

“유리창 깨면 돈 물어줄까 봐 밧줄에 매달려 있던 애들이 자동차는 열여섯 대를 부쉈네?”

<극한직업>의 주인공들은 경찰 조직 내에서 문제적 인물만을 모아놓은 팀입니다. 제각기 그냥 ‘바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늘 문제를 몰고 다니고, 그 문제들로 인해 후배에게 승진을 빼앗기는 등 조직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결국 좌천될 위기에 처하는 등 더 이상 물러설 곳 없게 되자 그들은 퇴직금을 털어 치킨집까지 창업하며 상황을 반전할 큰 사건을 해결코자 합니다. 늘 그랬듯 그들의 예상과 달리 생계는 물론 생명까지 위태로워지지만, 마약사범을 일망타진, 문제아 딱지를 벗고 표창까지 받습니다.    


“하자나 결점이 있는 주인공이 그 하자나 결점과 맞물린 고난으로 인해 인생의 밑바닥에 이르고, 그 고난을 견뎌 내거나 극복하는 과정에서 고통과 죄악에서 벗어난다.” 천만 관객 영화는 이렇게 예상이 가능한 뻔한 영화입니다. 


보수적인 것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보수적인데도 불구하고 천만관객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결국 이러한 캐릭터 설정과 플롯이 우리나라 관객에게 통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결국 영화관에 가면 비슷비슷한 영화들만 보고 오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신선함을 찾는 사람들이 한국 상업영화를 기피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매해 한국 상업영화 관객 수는 줄고 있습니다. 반면, 거대 자본이 관심을 가지지 않은 독립 영화들에서는 신선한 시도가 엿보이며 관객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기자 생활을 하며 3년여 쓴 책 '재미의 발견'의 일부입니다. '재미의 발견'은 3월 26일 정식 출간되며(어쩌면 출간일이 앞당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에서 예약 판매 중입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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