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기복주의 신앙, 즉 복을 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이다.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복’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온다.(130여 번 등장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 이 말은 진리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복’이라는 단어를 세속적으로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취직하게 해달라고,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무병장수하게 해달라고,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 이것이 구복의 끝이다.
세속적인 요청이 곧 복이기 때문에, 이것 외에는 더 빌 것이 없다.
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하던 것이
십자가 앞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로 바뀐 것뿐이다.
사실, 성경을 통틀어서 명확하게 ‘복’을 정의한 구절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복’은 세속적인 복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3~10절)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여덟 가지 복을 말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세속적인 복은 두 가지뿐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와 ‘배부를 것임이요’다.
땅을 받고, 밥을 먹는다. 그리 거창한 복도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성경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기독교에서의 복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느끼는, 그런.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무언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복’을 그저 돈과 명예, 건강 등으로만 받아들이고
기도할 때 그러한 복만을 빌게 됐을까.
혹자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고 교회가 부흥한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제강점기, 6.25전쟁, 산업화 등을 거치며 ‘먹고 사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됐던 시대의 영향이라고 추측한다.
산업화로 정신없던 시절 개인의 행복이나 민주화를 놓쳤듯이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의 진정한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저 당장 절실한 세속적인 복을 빌고, 또 빌었다는 것이다.
물론, 세속적인 구복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구복만 추구하는 행위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구복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여야 하는데, 돈 같은 세속적인 것이 중심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돈을 숭배하는 우상숭배 행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부터라도 기도를 바꿔보자. 기도를 10이라고 하고 세속적인 구복이 9였다면, 이제는 3 정도로. 나머지 7은 ‘하나님의 나라’로 채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