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가 유독 한 문장이 마음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사사기에서는 이 문장이 그랬다.
“여호와께서 이 싸움을 이기게 해주신다면 정말 나를 그대들의 우두머리로 삼겠소?”
이 말은 사사 입다의 말이다.
입다는 성경에서 ‘용감한 전사’라고 표현되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형제들에게 내쫓겨 건달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가 기생에게서 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이렇게 말하며 입다를 내쫓는다.
“너는 다른 여인에게서 난 자식이야. 그러니 우리 집안에서 물려받을 유산은 하나도 없는 줄 알아라.”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즈음 암몬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쳐들어오고
‘용감한 전사’가 아쉬워진 길르앗(입다의 아버지) 장로들은 염치없게도 입다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는 지금 암몬 사람들과 싸우러 나가려는 참이오. 그대가 와서 우리의 사령관이 되어 싸워 주시오.”
당연히 입다는 서운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쏘아 붙인다.
“당신들이 전에는 나를 미워하여 우리 집안에서 나를 억지로 내쫓다시피 하여 나가게 하더니 이제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오는 것이오? 그래, 어려운 일을 당하였다고 내게 찾아오면 내가 도와줄 줄 알았소?”
길르앗 사람들은 이제 사정한다.
“우리가 그대에게 이렇게 부탁드리는 까닭은 우리가 지금 암몬 사람들과 싸움이 붙었기 때문이 아니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사람들을 무찌릅시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가 그대를 길르앗 땅의 우두머리로 삼겠소.”
그러니 입다가 답한다.
“여호와께서 이 싸움을 이기게 해주신다면 정말 나를 그대들의 우두머리로 삼겠소?”
“그 싸움에서 이기면 정말 나를 그대들의 우두머리로 삼겠소?”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 싸움을 이기게 해주신다면”이 붙는다.
모진 말로 내쫓았던 사람들이 아쉬워서 다시 찾아올 정도로 용감한 용사이더라도
싸움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렸다고 뼛속까지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답변이 바로 튀어나온 것이다.
입다의 마음에는 자신은 없었으나 하나님이 있었다.
한편, 입다는 싸우기 전에 이렇게 기도드린다.
“주님, 주께서 저에게 암몬군을 넘겨 주시어 우리가 이기게 해 주신다면, 그래서 제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때 제 집 앞에서 저를 처음으로 맞이하는 사람을 여호와께 바치겠습니다.”
인신제물을 바치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습에 반한 것이라, 어떻게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아마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과 어울려서 일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 서원한 이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입다는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뒤, 그의 집 앞에서 그가 사랑하는 외동딸을 맞이한다.
그리고 옷을 찢으며 울부짖는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얘야! 네가 이토록 내 가슴을 찢어놓다니! 네가 어쩌자고 나를 맞으러 나오느냐? 내가 여호와께 입방정을 떨었으니 지키지 않을 수도 없고, 정말 큰일 났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결국 입다는 딸을 번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이 일이 이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통이 되어 젊은 여인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생각하며 나흘씩 애곡한다.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입다라는 사사의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과 연결돼있었는지, 그 믿음의 크기를 생각하면 아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