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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Jul 23. 2020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인?

나태주 시인과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인도 독실한 기독교인. 

시인이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그런 경험이 참 많아요. 일본 어느 절에서 반가사유상을 본 적 있어요. 우리 신라에서 보냈다는 나무로 된, 그리 크지 않은 불상. 근데 사람들이 다 그냥 지나가요. 저는 자세히 오래 보고 싶어서 오래 봤는데, 그런데 자세히 보고 오래 봤는데도 예쁘지가 않더라고요. (웃음) 사랑스럽지가 않더라고요. 왜 그럴까? 이유는 제가 위에서 봤기 때문이었어요. 위에서 봤기 때문에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았다. 바라보는 위치가 중요해요. 자세를 조금 낮추면 훨씬 좋게 보여요. 부드럽게 보여요. 더 자세를 낮췄어요. 그러니까 상당히 아름다우세요. 이제 주저앉았어요. 그랬더니 웃으세요. 바로 그거예요. 위에서 내려다보면 예쁘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고 대단하지 않아 보여요. 낮아지고, 엎드리고, 무릎 꿇고 세상을 올려다보라고.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라고. 굽어보는 세상도 좋을 수 있지만, 그것만 있지는 않다고.”


자세를 낮추면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된다. 


이렇듯 사랑은 낮은 데서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낮은 곳에 있는 자들에 집중한다. 

성경은 특히 가난한 자, 병든 자, 과부, 궁핍한 자, 고통당하는 자, 억압받는 자, 즉 사회에서 차별받는 자들을 사랑한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오”(누가복음 6장 20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4장 18절)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눈먼 자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미천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사야 29장 18~19절)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시편 72장 12~14절)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이사야 3장 13~15절)


등등. 


가난하고 궁핍하고, 미천하며, 억압받는 자는 모두 차별받는 자들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차별받는 자들을 편애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초기 교회 구성원들 대다수는 가난하고 비천하며 차별받는 이들이었다. 

인도에서도 기독교는 카스트제도 최하단에 있는 불가촉천민들이 가장 많이 믿는다고 한다.  


차별받는 자들에 대한 편애. 

그런데 시각을 달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차별을 싫어하신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차별적 구조를 종식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중략)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중략) 그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이사야 2장 11~17절)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흙먼지)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로다.” (이사야 26장 4~6절)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편 82장 2~4절)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사야 10장 1~2절)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장 17~18절)


일부 기독교인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차별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차별을 금지하는 데 반대하는 것이다. 

매년 열리는 퀴어 축제 반대편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때로 뭉쳐서 혐오 발언들을 쏟아낸다. 

나는 이것을 보고 매년 의아하다. 


물론, 이제는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더 많다고 들었다. 

성소수자들을 개인적으로 싫어할 수는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차별은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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