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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Bigstar Sep 13. 2017

남자는 필요 없어

영화 <아토믹 블론드>


아토믹 블론드

남자는 필요 없어



액션 영화는 남자 배우에게 많은 기회를 주는 장르였다. 단련된 근육과 강인한 체력으로 무기를 다루고 몸을 날려 적을 제압하는 남자 배우들의 화려한 액션 장면은 액션 영화의 핵심이었다. 액션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것은 남자 배우에겐 대단한 자부심이 되었을 것이다. 

남자 배우들이 액션 영화를 독점하는 사이 여자 배우들은 그들의 곁에 맴도는 역할을 해왔다. 위기의 순간에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남자 주인공에 매달리다시피 질질 끌려 이동하는 게 액션 영화 속 여배우들의 동선이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적에게 붙들려 위기를 자초하는 문제 덩이로 그려지기도 했다. 와중에 위기의 순간에 적을 향해 몽둥이라도 휘두른다고 해도 적이 휘두르는 주먹 한 번에 나가떨어지곤 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1994년 작품인 얀 드 봉의 <스피드>에 출연한 산드라 블록의 캐릭터를 보고 남자 주인공 옆에서 징징대지 않고 제 역할을 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찬사가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액션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화의 필요가 감지되고 그것이 현실의 반영임을 깨달았음이 최근 2~3년 사이 스크린을 장악한 여성 액션 스타의 모습에서 느껴진다.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샤를리즈 테론, <어벤저스> 시리즈와 <루시>의 스칼렛 요한슨, <원더우먼>의 갤 가돗, <악녀>의 김옥빈까지 액션 영화에서 주도권을 거머쥔 여성 캐릭터를 만나는 게 어색하지 않다.

그 선상에서 가장 최근작인 <아토믹 블론드>를 보자면 주도권을 거머쥐는 데 그치지 않고 남자는 아예 필요 없다고 외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 그것도 아주 짜증 나서 무표정하게 외치는 것 같다.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은 다시 한번 샤를리즈 테론이다. 


샤를리즈 테론의 액션 시퀀스


1989년 냉전시기,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그 짜릿한 순간을 전후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비밀정보요원들이 어떻게 물밑에서 서로 '속고 속이며'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쉴 틈 없는 액션 시퀀스의 연속으로 보여주는 작품 <아토믹 블론드>. 그 중심엔 단연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영국 MI6의 비밀요원 로레인 브로튼이 있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은 '속고 속이는 게임'에 있다. 그 누구의 정체도 분명하지 않으니 총알이 어느 방향에서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내내 긴장하면서 보게 된다. 영화 초반에는 로레인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하기만하면 여지없이 펼쳐지는 적의 공격과 보란 듯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들이 다소 맥락 없어 보이기도 한다. 마치 게임의 각 단계를 클리어하고 넘어가듯 연이어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가 샤를리즈 테론의 몸으로 표현되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인위적인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포인트가 '속고 속이는 게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액션 시퀀스의 연속이 주는 피로감은 스릴러를 파헤치는 쾌감으로 바뀐다. 진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서로의 술수를 정보로 습득하고 덫을 놓는 판국이니 어딜 가나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로레인이 가는 모든 장소에서 펼쳐지는 속고 속이는 게임의 액션 시퀀스에서 샤를리즈 테론의 액션 연기는 더욱 부각되고 더욱 감탄하게 만든다. 얼음물 목욕으로 매일매일 자신을 재조립하듯 다듬는 로레인의 모습은 그녀를 초월적 인간으로 보이게까지 한다. 


로레인과 델핀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로레인의 액션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남자는 필요 없어'일 것이다. 영화 초반 베를린에 도착한 로레인이 차 안에서 KGB요원들과 대립하는 액션 시퀀스가 등장한다. 대충 분위기가 파악되자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 옆에 앉은 요원을 때려잡고 앞에 있던 요원까지 처치하는 그 장면을 보고 있자면 마치 차 안에서 추근대며 질척거리는 남자들에게 꺼지라는 듯 하이힐을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시작이다. 모든 액션 시퀀스에서 남자들과 대적하고 있는 힘을 다해 괴성 같은 기합을 넣으며 그들을 때려눕히는 로레인의 모습을 보자면 정말 이 순간 남자의 존재는 필요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더군다나 로맨스의 대상으로도 로레인에게 남자는 필요 없다. 남자 따윈 필요 없는 로레인의 전사가 너무나도 궁금해지기도 한다. <아토믹 블론드>의 속편이 나온다면 로레인의 전사를 담은 이야기여도 좋겠다. 


감독 데이빗 레이치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치밀하게 속고 속이는 게임이 벌어지던 현장에 남자 따위 필요 없는 여자 주인공을 내세워 멋들어진 액션 영화로 완성한 공은 감독 데이빗 레이치에게 돌려도 될 것 같다. <존 윅>의 공동 감독이자 2018년 공개될 <데드풀 2>의 감독이기도 한 그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감독보다 스턴트맨으로서의 경력이다. 1997년부터 스턴트맨으로 활약했고 <파이트 클럽><미스터&미시즈 스미스>등 5 편의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의 스턴트 대역을 했다. <300><본> 시리즈의 스턴트맨을 했고, 다수의 영화에서 조연출로 경력을 쌓던 그가 액션이 중심에 있는 영화의 감독이라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어 보인다. 

<아토믹 블론드>는액션 만큼이나 상황에 어울리는 음악의 사용이 인상적이다. 80년대 배경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당시의 팝 음악을 적절히 사용한다. 시각적 쾌감과 청각적 쾌감이 역시나 기대되는 <데드풀 2>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상승하는 것도 <아토믹 블론드>의 감상이 한몫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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