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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Bigstar Sep 26. 2017

정석적인 각본이 주는 훈훈한 감동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영리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



10년이 되었어도 1년 같은, 1년이 되었어도 10년 같은

시나리오의 정석이 주는 오랜만에 느끼는 포근한 감동


오래되었어도 낡아 보이지 않고 포근하고 반가운 것들이 있다. 오래 사귄 친구들도 그러하고 날 때부터 함께 산 가족도 당연히 그런 존재이리라. 상품으로 치자면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는 초코파이니 새우깡이니 하는 상품들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옛 방식이나 스타일이 유행을 타고 넘어 다시 돌아오지 않던가, 클래식이니 레트로니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오래됨이, 시작된 지 오래된 방식이 늘 구식으로 쓸모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볼 때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전부터 사용된 오래된 시나리오 작법이나 영화의 구성법, 캐릭터의 설정이라고 해서 그 자체로 구닥다리 무쓸모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영화가 있다. '그래, 이게 시나리오의 정석이지!' 하는 깨달음을 주는 영화가 있다. 오래되었다고 기피하며 다들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사이 뒤로 밀렸지만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닌 방식이 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이 모든 깨달음으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영화다. 나옥분 할머니(나문희)를 영화 속에 처음 등장시킬 때 어디까지 그녀의 정체를 드러낼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주변 인물들과 만나게 할 것인지, 어떻게 그녀와 구청 공무원 박재민(이제훈)을 만나고 얽히게 할 것인지, 영화의 톤은 코미디와 드라마를 어떤 규칙과 법칙에 따라 배치할 것인지, 감동은 어떤 부분에서 터지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설계하는 정석적인 시나리오 작법 안에서 너무나도 영리하게 길을 찾아낸 결과물로 보이는 작품이 바로 <아이 캔 스피크>다.


구청직원 민재에게 영어를 배우는 옥분 할머니


이 영화의 정보가 처음 눈에 보였을 때 나는 여지없이 괴팍한 할머니가 구청 공무원 청년에게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 주요한 설정인 코미디 영화로 인식했다. 딱 그 정도의 정보만 영화사에서 노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김성수 감독의 <영어완전정복>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고 그것은 이 영화에 호감을 갖게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시사회가 진행되고 정식 트레일러가 공개되면서 나옥분 할머니가 그저 코미디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괴팍한 할머니 캐릭터가 아님을 알게 됐다. 시사회 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는 후기와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에 대한 정보를 접한 후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휴먼 코미디 같은 톤으로 시작해서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는 영화의 수순대로 정보를 순차적으로 공개하는 것까지도 이 작품의 홍보 전략이었던 모양이다.  


막걸리를 마시며 아재개그를 시전하는 민재, 진주댁과 옥분 할머니


신파가 아니라 감동을 전하는 현명하고 포근한 방식


괴팍한 동네 주민인 할머니와 구청 직원, 할머니 주변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소소한 일상의 드라마와 코미디를 이어가며 진행되던 영화는 점점 할머니의 개인사와 과거사에 드리웠던 베일을 하나씩 걷어내고 그것을 우리의 아픈 역사의 한 지점과 연결시킨다. 일제 강점기 강제로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강제종군위안부로 살아내야 했던 할머니,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시간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에 서두름이나 조급함은 없다. 사람이 겪은 아픈 고통을 직접 드러내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알고 다가가게 만드는 것, 그것은 이 영화가 택한 현명함이자 포근함이다. 코미디와 드라마의 성격을 넘나들며 차곡차곡 쌓이던 관계들이 진지한 인물의 개인사가 드러나는 순간에 느닷없이 신파로 흐르는 함정을 뛰어넘어 단단한 이야기를 완성하게 하는 자연스럽고 차분한 접근법이 돋보인다. 구청 공무원 재민이 할머니에게 영어를 가르쳐드리게 되는 계기, 재민의 개인사, 재민과 재민의 동생이 나옥분 할머니에게 의지하게 되는 과정, 시장 상인들과 할머니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것이 할머니의 개인사가 드러나는 순간에 억지스럽지 않고 신파스럽지 않게 감동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굉장히 아픈 개인사를 겪어낸 할머니가 그것에 맞서기로 마음먹고 당당하게 어려운 첫걸음을 떼게 되는 모습, 그 안에서 펼쳐지는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관객에게 느닷없이 던져진 장치처럼 보이게 하지 않는 것이다. 막판에 결국 울어버리게 되었지만 그 전에 눈물이 마음을 먼저 적신다. 단순히 눈에서 물을 흘림으로써 쏟아내고 휘발하는 신파가 아니라 인간의 따뜻함, 관심과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감동이 마음을 적시는 과정을 켜켜이 쌓고 마지막 순간에 그것이 눈물로 터져버리게 하는 것이다. 과하거나 트릭을 쓰지 않고 시나리오의 정석을 지키고 감정을 쌓아가며 관객에게 이야기에 공감하고 캐릭터를 이해하고 감동하게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시나리오와 이 만듦새는 인정하고 싶다.


족발집 사장 혜정과 옥분 할머니


탄탄한 시나리오의 명가 명필름을 다시 보다


이런 시나리오의 성취는 과거 탄탄한 시나리오의 완성도로 명성을 쌓아왔던 제작사 명필름을 돌아보게 한다. 또한 명필름에서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로 감독으로 활동했던 김현석의 작품으로도 인정하게 한다. 물론 이 시나리오의 원안자이자 제작사 시선의 대표인 강지연과 유승희 작가, 각색 작업을 통해 시나리오를 탄탄하게 만든 작가들의 노력에 이 상찬을 돌릴 수 있겠다.

20년 전인 1997년 추석 시즌에 개봉했던 명필름의 <접속>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 때도 이미 탄탄한 시나리오, 말이 되는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기획영화로 관객을 만났던 대표적인 제작사였다. <아이 캔 스피크>의 크레디트에서 명필름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시나리오와 영화의 완성도에 더욱 신뢰감을 부여한다.

명필름에서 제작했던 <YMCA 야구단>으로 영화감독 데뷔했던 김현석 감독은 후에도 <광식이 동생 광태><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명필름과 함께 했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다시 만난 명필름과 김현석 감독의 작업은 그야말로 과거의 명성과 영예를 다시금 재현하는 결과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김현석 감독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을 다뤘던 <스카우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 영화 역시 처음엔 배우 임창정이 80년대 선동렬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는 인물로 등장하는 코미디로 인식되었다. 사전에 인지됐던 영화의 톤과 달라서 영화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다루며 진지해지는 후반부를 낯설어하고 당황했던 관객들의 반응이 떠오른다. 초반에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들다가 다소 무거울 수 있고 진지해 질 수 있는 소재와 이야기로 전환하는 시나리오 쓰기는 그때부터도 김현석 영화의 특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쎄시봉>까지 그의 영화는 처음부터 무게를 잡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스카우트> 에 이어 드라마와 코미디를 넘나들며 감동을 이끌어내는 진지한 소재로 전환하는 방식이 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다시 시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스카우트>도 개인적으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초기 드러난 정보와 너무 다른 본 영화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이 캔 스피크>도 홍보 초반에 전달된 정보와 본 영화의 톤이 다르긴 하나 <스카우트> 때의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옥분 할머니의 개인사를 듣고 놀라는 진주댁


캐릭터와 사건이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얽히고 그것이 쌓여 결정적인 사건에서 총체적인 감동을 터뜨리게 하는 정통적인 시나리오의 공식이 잘 녹아든 영화를 결과적으로 빛나게 하는 역할은 역시나 배우의 몫이다. 괴팍한 동네 할머니의 모습에서 아픈 역사를 관통한 개인사를 드러내며 감동을 전하는 나문희 배우의 연기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좋고 이제훈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시장 상인으로 등장하는 진주댁(염혜란)과 혜정(이상희)의 캐릭터도 참 좋다. 미첼을 연기하는 배우 마티 테리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들었다. 해외 촬영을 하면서 현지의 배우들이 이야기에 들어올 때 자칫 돌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작품에선 주연배우에 처지지 않는 현지 배우들의 연기까지 참 좋았다.


보름달을 보면서 가족과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안에서 보름달처럼 가득 찬 훈훈함을 만끽할 수 있는 명절이 추석이다. 영화 속 장면에서도 그런 감동이 느껴지는데, 영화 전체의 에너지가 훈훈함에 닿아있다. 그런 면에서 추석에 맞춤이면서도 우리의 아픈 역사 속 개인의 문제까지 놓치지 않고 다루며 인간애를 담뿍 담아낸 영리한 시나리오를 지닌 영화가 <아이 캔 스피크>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당장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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