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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Bigstar Oct 03. 2017

그대들과 함께한 20세기는 찬란했다

영화 <우리의 20세기>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


그대들과 함께한 20세기는 찬란했다



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20세기에는 추억과 낭만이 축복처럼 남아있다. 오로지 낭만적이기만 했다고 반추하기에는 시대의 아픔이 너무나도 크게 남아있는 세기이기도 했으나 내 생에는 '응답하라~' 시리즈가 전달하는 것 같은 추억과 낭만의 기억이 크게 남았으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신승훈, 김건모,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를 목격했고 그보다 과거인 조용필, 전영록, 이선희, 소방차의 시대에도 발을 걸쳤다. H.O.T., 젝스키스, S.E.S., 핑클과 함께 20대를 맞이했다. 6.10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의 변화를 최루탄의 매운 냄새를 맡으며 동네에서 뛰어놀았던 추억으로 기억하며, 86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의 열기를 2002 월드컵보다 먼저 경험했다. 교복을 벗은 누나, 형들의 자유를 봤고 교복을 다시 입은 첫 세대가 되기도 했다. 훈련용 총을 들고 베레모를 쓰고 운동장에서 교련 수업을 받은 마지막 세대이고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변하는 것을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밀레니엄 시대를 앞둔 불안을 경험했고 그 소동의 카운트다운을 목도했다. 배창호와 이명세의 영화를 알고, 강우석의 영화를 보면서 성장했으며, 이창동과 홍상수를 거쳐 봉준호와 박찬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강수연, 심혜진, 최진실의 트로이카를 알고 심은하, 전도연, 고소영의 트로이카도 이미 과거형으로 흘려보냈다. 

해저도시와 화성의 삶을 꿈꾸고 우주여행의 상상을 그림으로 그렸던 20세기에 21세기는 꿈의 세상이었다. 추억이 가득하고 문화적으로 풍성했던 20세기를 살았으면서도 20세기는 아쉬움 없이 보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반면 21세기는 두려움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이상의 존재였었다. 밀레니엄의 호들갑스러운 소동만 봐도 우리는 떠나보내야 할 20세기보다는 들이닥칠 21세기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21세기도 그저 하루하루의 현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쉬움 없이 흘려보냈던 20세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21세기가 허락한 모든 편리하고 신기한 문명의 이기에 황홀해했던 감정은 슬슬 시들해져 가고 마음은 떠나보냈던 20세기를 추억한다. 우리가 보낸 20세기는 그만큼 소중한 가치를 지닌 채 우리의 마음속에, 아니 우리의 현실 속에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엄마 도로시아와 아들 제이미


20세기에 대한 향수 타령을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마이크 밀스의 <우리의 20세기>를 보는 동안 지나온 20세기에 대한 향수에 흠뻑 젖었기 때문이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한 이 작품의 주인공 소년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는 20세기를 살아온 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이미를 둘러싼 엄마와 여자 친구, 같은 집에 사는 누나와 아저씨 그리고 친구들은 하나같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제이미의 현재를 만든 20세기의 사람들이다. 나에게도 제이미처럼 그렇게 내게 영향을 미쳤던 20세기의 사람들, 특히 20세기의 여자들이 있었다.  21세기에 밀려 버린 시대이고 지나버린 과거의 시간들이지만 그 20세기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는 데 더없는 양분이 되어준 사람들이었다. 특히 나와 함께 했던 20세기의 여자들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세상을 이해하는 마음의 행로를 결정하게 해 준 사람들이다. 기득권은 가졌지만 철없어 보였고 욕망에 충실했으며 콤플렉스를 지녔던 내 주변의 20세기 남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배척당하고 덜 가졌고 희생을 요구받았지만 제 역할을 해내며 묵묵히 현명하게 살아낸 내 주변의 20세기 여자들을 나는 더 의지하고 바라보며 성장한 것 같다. 그렇게 나와 함께 해 온 20세기 사람들, 20세기 여자들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게 한 영화가 <우리의 20세기>다. 영화를 보면서 20세기의 그들을 전혀 알 도리가 없는 21세기의 사람들이 일정 부분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낭만도 뭣도 없이 각박하게만 흘러가는 것 같은 21세기는 그림으로까지 그리며 꿈꿨던 문명의 발달은 이뤄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발달을 이뤄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1세기의 사람이 20세기의 사람을 능가할 정도로 좋지는 않은 나는 그래서 <우리의 20세기>를 보면서 그때 그 사람들, 그 20세기의 여자들을 다시금 추억하는 의식을 행한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애비와 줄리


1979년 미국 남부 산타바바라, 셰어하우스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도로시아(아네트 베닝)에게 가장 큰 과제는 이제 15살인 아들 제이미를 키우는 일처럼 보인다. 자신과는 다른 성, 다른 세대를 살아가는 아들을 이해하고 제대로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은 셰어하우스에 사는 포토그래퍼 애비(그레타 거윅)와 제이미의 친구 줄리(엘르 패닝)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자신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아들 세대에 가까운 두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자신은 생이 다해 제이미의 곁을 지켜주지 못하는 때가 오더라도 이 젊은 두 여자는 제이미의 곁에 머물러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를 통해 제이미의 삶에 이 20세기의 여자들은 더 큰 축을 형성하며 파고들지만 동시에 커다란 혼돈을 안겨준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줄리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지만 줄리는 다른 남자애랑 섹스한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털어놓으며 편안한 친구 이상의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는다. 애비를 통해 젠더 이슈를 다룬 책도 읽게 되고 어른들의 자유로운 문화를 체험하며 경험치를 높여가는 것 같지만 또래 남자아이들은 깨닫지 못한 세계를 앞서 알아가며 깨어낸 감성은 예술병자라고 놀림받는 부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애비와 줄리에게 영향받은 모습을 극단적인 부작용으로 받아들이는 엄마 도로시아와의 갈등 역시 발생한다. 보고 참고할만한 남성은 같은 집에 머무는 윌리엄(빌리 크루덥)뿐이지만 그마저도 히피 성향의 목수로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예의 하나일 뿐이다. 




어느 것도 완전해 보이지 않고 모두가 혼돈 속을 통과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20세기의 혼돈과 충돌은 모두 21세기의 제이미를 만들어놓은 엄청나게 강력한 양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의 엔딩이자 20세기의 마지막 시점에 도로시아와 애비, 줄리와 윌리엄 그리고 제이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시점이 되면 그 20세기의 시간들이 혼돈과 불안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답을 만들어냈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 중반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애비에 의해 모두가 '생리(menstruation)'라고 외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웃기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그 장면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감정은 불안인 것 같다. 암과 불임에 대한 불안, 임신에 대한 불안, 모성의 책임에 대한 불안이 한데 얽혀 '생리'라는 외침으로 터져 나온다. 그런 불안은 시한폭탄처럼 늘 내재되어있었지만 결국 각자가 그 불안을 뛰어넘으며 각자의 방식대로 답을 찾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은 그들이 살아온 20세기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20세기 만의 그 힘이 분명히 있을 것임을 확신하게 되는 희열을 선사하는 것이다. 




험프리 보가트를 좋아했던 엄마 도로시아가 그녀의 꿈대로 경비행기를 조종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에 <카사블랑카>의 음악'As Time Goes By'가 흘러나오는 순간 마음은 요동친다. 마치 20세기의 대표적 단상들을 모아 붙인 듯한 그 장면은 21세기의 것들을 그러모은다고 해서 나올 수 없는 장면이기에 더더욱 뭉클한 감동을 준다. 21세기에는 없을, 21세기의 사람들은 알 수도 없을 20세기 사람들의 에너지, 20세기 여자들의 영향력을 아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뭉클한 행복감을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제대로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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