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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Bigstar Dec 27. 2017

2017년 영화 베스트 10

2017년의 영화는 나에겐 시였고 시인이었다. 

영화 <시인의 사랑>의 시인 현택기는 

'시인은 슬픈 사람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고, 

슬픔은 시를 쓸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했다. 


여느 해보다 슬픔, 아픔, 변화가 많았던 2017년,

내게 영화는 그런 슬픔을 대신해 울어주는 시인이었고 

그 슬픔을 시처럼 스크린에 담아준 존재였다.


시였고 시인이었던 2017년의 영화 10편이 여기에 있다. 



10. 정윤석 감독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2017년 가장 재미있게 본 다큐멘터리


이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잘 몰랐다. 호기심에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봤다. 처음엔 뭔가 싶었는데 점점 그들의 장난, 놀이, 음악, 활동이 무엇인지 보였다. 조롱, 반어적 표현과 거친 표현, 블랙 메탈에 영향받았다는 음악들이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정치색을 표출하느라 애써 벌이는 일이 아니라 웃기고 앉아있는 세상 것들을 향한 거침없는 외침이 그들이 노는 방식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거침없던 그들의 활동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법리적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세상의 희극으로 보였고 그 심판 앞에 움츠러들고 와해되는 그들의 모습이 슬펐다. 그것이 곧 대한민국의 모습이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다큐멘터리는 처음엔 꽤 불친절해 보였지만 중반 이후 그 구성의 완벽함에 감탄하게 했다. 다큐의 대상을 조금 보여주다 사이사이 인터뷰를 삽입하는 지루하고 뻔한 방식이 아닌 게 가장 좋았다. 한참을 밤섬해적단의 활동을 따라가며 보여주다가 중후반에 그 외 인물의 인터뷰를 삽입하는 구성이 몰입도를 높였다. 
그들의 음악을 보여주는 화면의 연출도 좋았다. 그간 다큐의 형식에 하품하던 나를 화들짝 깨우는 연출이 너무너무 좋았다! 밤섬해적단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꼭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9. 마이크 밀스 감독 <우리의 20세기>



나와 함께 했던 20세기 여자들을 떠올리다

감독 마이크 밀스가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영화는 마치 나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나와 함께 했던 20세기 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흡수됐다. 1979년 미국 산타바바라의 소년 제이미에게 한껏 감정 이입하여 마치 나의 모습처럼 느끼면서 영화를 봤다. 물론 제이미의 삶이 나의 삶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에 치이고 삶을 사는데 바빠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남자들과는 달리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내면의 생각들을 나눠주던 여자들이 20세기의 나를 키워준 양분임을 생각할 때 소년 제이미는 곧 나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자란 나도 20세기 여자들의 에너지를 양분으로 삼았을 뿐 그녀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지는 못한 것 같은 부채의식이 심리 저 아래 놓여있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2017년이었지만 올해의 나는 20세기의 나보다 더 페미니즘에 대한 외침에 소극적이었다. 그 또한 나에게 더해진 그녀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지막을 경비행기를 타는 엄마의 모습과 영화 <카사블랑카>의 노래 'As time goes by'를 흘려주는 것으로 감독은 그의 20세기의 여자들에게 마음 깊은 선물을 한 것 같다. 나는 나의 20세기의 여자들에게 무엇을 선물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보게 한다. 



8. 신준 감독 <용순>


여름 향기 풋풋했던 그 시절

여름 향기 가득한 풋풋했던 그때 생각에 잠겨서 봤다. 그 여름의 운동장 흙냄새, 땀 씻던 수돗가 물 냄새, 볕 냄새까지 아련히 떠오르더라. 
강에 던졌다고 돌에 그려진 그림이 지워지진 않음을 용순이도 안다. 그걸 지우고 새로 그리려면 노력과 시간이 필요함도 이젠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18살의 여름이 가는 것이다. 

여름마다 꺼내 보고 싶은, 여름이 그리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 푸름이 쨍한 햇살이 그리울 때면 꺼내 보고 싶은 여름 영화. 



7. 드니 빌뇌브 감독 <컨택트>


인간을, 인생을 다시금 사랑하게 만드는 SF

이 SF영화는 참으로 숭고하다. 엔딩씬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슬퍼서가 아니다. 숭고한 뭔가가 내 가슴을 울렸다. 인간은 참 보잘것없지만 그 몇몇의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너무나 숭고하다. 징글징글하고 지긋지긋한 게 인간이고 인생이고 세상 같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 그 마음이 다시 사르르 녹아버린다. 
SF작가는, 또 그것을 영상으로 표현해낸 이들은 이상주의자이고 낭만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원제목인 '어라이벌'이 더 곱씹을만한 의미를 지닌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 속 주인공은 남녀를 막론하고 어떤 공통점이 있음도 느꼈다. 그 또한 오늘의 숭고한 인상과 통한다.



6. 봉준호 감독 <옥자>



주류의 활동에 크고 작은 반기를 들고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가족이자 친구 같은 존재인 옥자를 지켜내기 위한 소녀 미자의 액션 어드벤처의 겉모양을 지녔다. 그런데 미자가 옥자를 지켜내기 위해 포기하는 것을 들여다보면 확실히 자본과 권력으로 뭉친 주류의 삶에 대한 당찬 거부의 내달림으로 이해된다. 동물해방전선(ALF)의 활약, 미란도 회사의 직원 박문도(윤제문)와 김군(최우식)의 대비되는 모습, 심지어 미란도 회사의 전-현 대표 낸시와 루시의 입장 변화까지도 모두 주류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저항의 내달림으로 보이고 그렇게 살아도  아쉬울 것 없이 완성되는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다시 돌아온 미자와 옥자의 집이 주는 평온함을 바라봐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자유다, 하지만 강요는 하지 말자, 서로.  이 영화가 한국 극장에 걸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벌어진 촌극도, 그에 따라 드러난 그들의 속물적 속내도 모두 이 영화에서 보이는 주류와 그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과 연결 지어 볼 수 있으니 올해의 영화, 올해의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엔드 크레디트 끝에 이어지는 쿠키까지도 주류에 저항하는 비주류의 새 연대를 보여준다. 그러니 역시 봉준호 영화답다. 사이사이 크게 터지진 않으나 피식 웃게 만드는 유머도 그렇고.



5.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마더!>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쓴 창세기, 계시록! 
성경을 소재로 꼴라쥬 한 아로노프스키식 묵시록!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He Story'라고 불릴 정도로 창조주 곁에 여성의 존재가 철저하게 결여된 성경에 'Her Story' 또는 'Mother's Story'를 덧댄 작가적 창의력이 이 영화 안에 태초부터 현재까지의 세상을 담아내는 창조력으로 느껴진다. 
내 평생 이런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영화를 다 보게 됐다는 생각에 머리와 가슴이 얼얼하다. 엔드 크레디트에 흐르는 노래 'The End of the World'까지 완벽하게 느낌표를 찍어댄다! 

대사 하나하나에서 성경 구절 그대로 쓰는 장면 등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영화인지라 어떻게든 쉽게 풀어내려 한 흔적이 느껴진 것이 조금 아쉽다. 더 밀어붙여서 더 미친 영화로 나왔어도 좋았을 것 같다. 
이 작업을 하면서 대런 아로노프스키와 사랑에 빠진 제니퍼 로렌스의 마음이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고 쓰고 싶다. 이런 특별함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마치 영화 속 'HIM'을 사랑하는 그들처럼 말이다.



4. 뤽 다르덴, 장 피에르 다르덴  감독 <언노운 걸>



언노운을 노인으로 만드는 사명감과 책임감에 대하여

다르덴 형제의 근작 중 <내일을 위한 시간>은 나의 이성을 움직이게 했다면 <자전거 탄 소년>은 감성을 건드린 작품이었다. 그 기준으로 보자면 <언노운 걸>은 감성보다는 이성을 건드리는 작품이고 그 점이  더 좋게 와 닿았다.

의사 제니는 단 한 번 병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확고한 원칙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닥친 죄책감은 꽤 컸다. 관객인 내 이성을 움직이게 한 것은 그 죄책감을 마주 대하는 그녀의 행동이다. 그 행동은 단순히 미결감을 해소하여 심리적 안녕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니었다. 원칙을 준수한 행동으로 인해 개입된 이 사건 속 한 사람으로서 문제가 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밝히겠다는 다부진 사명감과 책임의식 있는 용기의 행동이었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제니라는 사람의 인생이 되고 그것이 사회의 인식과 문화를 만들고 다시 그것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영화였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영화 속 소녀의 정체만은 아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영화의 끝에 이르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내가 안다고 여겼던 사람들의 속에 담긴 마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한 순간을 제외한 모든 순간에 거부하지 않고 문을 열었던 제니의 행동은 그저 문을 여는 행동 이상의 의미로 읽힌다. 열어야 알 수 있는 것, '언노운'을 '노운'으로 만들어가는 행동인 것이다.



3. 파블로 라라인 감독  <네루다>



감독의 독창성이 관객을 환상문학 속으로 초대한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작품을 (어쩌면 우리가 윤동주를 배우고 읽은 것처럼) 잘 이해하는 칠레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더욱 특별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나, 그렇지 않은 내게 이 영화는 형식적으로 더욱 인상적인 작품이다. 명성이 자자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삶의 한 때를 가져와 한편의 문학 작품처럼 가상의 인물을 투입해 구성한 것이 너무나도 신선했다. 영화 속 네루다(루이스 그네코)와 그를 쫓는 비밀경찰 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존재를 작가와 작품의 주인공, 작가와 비평가, 작가와 독자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 그 자체로 이 영화는 문학 같았다. 마지막 장면 뒤 암전 되고 스크린에 뜨는 'FIN.' 역시 한 편의 소설 끝에 붙은 표시처럼 느껴지게 한다. 

꿈을 꾸듯 몽환적이지만 끊임없이 관객에게 말을 걸고 너무나도 아름답게 펼쳐지는 영화 <네루다>. 추격의 장면 속에 담긴 유머가 일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떠올리게도 했다. 



2. 드니 빌뇌브  감독  <블레이드 러너 2049>



눈 앞에 펼쳐지는 엄청난 축제를 체험한 기분

기대가 컸으나 어느 순간 마음을 비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감히 내가 드니 빌뇌브와 리들리 스콧을 잠시나마 얕봤다는 사실에 머리를 숙였다. 
영화 길다, 2시간 40분.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 (아마도 데커드가 첫 등장하는 순간부터일 것이다) 휘몰아치며 징글징글하게 파고들어가는 집요함에 항복하게 된다. 시각적, 청각적 쾌감도 훌륭하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보는 것 같은 순간도 있다. 홀로그램이 이끄는 액션 시퀀스는 서늘하고 세련되고 환상적이다. 압도적인 시각 이미지가 정말 압권이다! 왜 리들리 스콧이 드니 빌뇌브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이로써 올해의 베스트 10에 드니 빌뇌브의 영화가 두 편이 됐다.) 
영화 내내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하게 하는 눈의 역할과 마지막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이 영화를 만든 누군가가 우리말 '눈'의 두 가지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혼자 생각을 다 해봤다. 눈 앞에 펼쳐지는 엄청난 축제를 눈으로 마음으로 한없이 즐기게 하는 엄청난 체험을 주는 영화다. 



1.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덩케르크>




놀란, 나를 가지고 놀았어, 놀라워

머리 좋은 사람이 생각도 이리 튼튼하니 이게 멋이구나!  

세 개의 시점-관점을 놀랍고 희한하게 펼쳐내는 <덩케르크>를 보자면 영화는 관객을 감정을 이끌어내는 예술가가 부리는 수학이자 과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종류의 수학과 과학에 능수능란한 천재의 작품을 보자니 두 손 두발 들고 그냥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천재 놀란이 만든 <덩케르크>는 결국 나를 울렸다. 후반부 20분 정도는 거의 흐르는 눈물과 흐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나를 울렸는가. 견뎌내고 배려하고 참아내는 묵직한 인간성이 나를 울렸다. 무시무시한 전장에서도 결코 소멸하지 않는 배려와 용기, 먼저 난 사람들의 나중 난 사람들을 향한 어른스러운 보살핌과 책임감, 인간을 몸뚱이가 아닌 숨 쉬는 생명체로 받아들이고 살았든 죽었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해주고 존중하는 마음, 이 모든 옳고 그름의 플러스와 마이너스 극에서 플러스 극을 향하는 인간성의 묘사가 나를 울렸다.

집이 보이는 곳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집으로 데려가기 위한 사람들의 힘겨운 움직임이란 언제나 마음을 울리는 법이다. 그런데 <덩케르크>에서 돌아간 집이란 가족들이 뛰어나와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는 클리셰 소굴이 아니기에 더욱 감동을 준다. 응원의 술병으로, 응원의 모포로, 응원의 신문으로 존경의 마음까지 표현된다.




2018년에도 계속될 영화라는 위로, 영화라는 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2017년을 보내고 2018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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