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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Bigstar Apr 16. 2021

집을 품고 스스로 집이 되어가는
선구자의 길

영화 <노매드랜드>

영화 관람 후 이벤트로 받은 <노매드랜드> 오리지널 포스터(메가박스)


“난 홈리스가 아니야. 하우스리스와 홈리스는 다르잖니?”


아마도 평생의 집(home)을 꿈꾸고 살았을지 모르겠으나 그 집이 있던 땅, 거주지(house)를 상실하고 그 곳이 무너지자 스스로를 집(home)으로 만들고 자신 안에 집을 품고 온 세상을 거주지로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 

<노매드랜드 Nomadland>다.


미국 서부 네바다주의 엠파이어. 이 곳은 US석고(USG) 직원들이 거주하는 컴퍼니타운이었으나 2011년 광산이 폐쇄되면서 마을 자체도 소멸된(우편번호도 사라진) 고스트 타운이 된 곳이다.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남편과 함께 USG에서 근무하며 엠파이어에 살았으나 거주지도 상실하고 남편과도 사별했다. 그 후, 그는 밴을 개조하여 그것을 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특정한 거주지 없이 떠도는 노매드가 되어 아마존 물류창고, 비트 농장 등 그때그때 구해지는 일들을 하면서 산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또다른 노매드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귀 기울인다.




<노매드랜드>는 픽션의 탈을 쓴 논픽션이거나 논픽션의 탈을 쓴 픽션이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포함한 몇몇 배우들을 제외하면 실제로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하는 노매드들이다. 물론 그들도 픽션 안에서 연기를 한 것이지만 그들의 삶이 시나리오에 반영됐고, 무엇보다 실제 노매드가 자신의 삶의 자취를 투영하여 연기를 하는 것은 그 어떤 기성 연기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다보니 연기자로 중심에 놓여진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연기에 또다시 감탄이 나온다. 실제 노매드는 아니지만 노매드를 연기하고 노매드들과 함께 하는 삶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스토리를 캐릭터에 싣는 준비를 했고 온전히 노매드의 삶에 몰입한 것 같다. 힘을 하나도 주지 않고 온 몸을 풀어서 모든 것을 보여주는데, 완전히 열린 상태에서 캐릭터를 입은 배우의 면모는 이런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연기뿐이랴. 이 영화는 어느 구석 하나 힘을 주지 않는다. 안간힘을 쓰지도 않는데 관객을 끌어안고 눈을 마주친다. 내내 적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때때로 아주 가까이 다가가고 오랫동안 함께 걷는다. 그리고 깊이 바라보고 차분히 들어준다. 결국 펀이 각 지역에서 만나는 노매드들의 이야기와 삶을 하나씩 하나씩 듣고 함께 걷는 과정이기도 한데, 흡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이유도 그런 요소 때문이다.



거주가 보장된 정착지를 갖는 것은 중요해보인다. 안정적인 터전이 될 수 있고 그 거주지에서 진짜 나의 집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본이 칼춤을 추는 지금, 정착지를 갖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힘겨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떤 이들은 기회를 노리고 잡아 n개의 거주지를 점령하고 자본 위에서 현란한 스텝을 밟지만, 어떤 이들은 1개의 기회마저도 박탈당하거나 상실한다. 이 영화에 담긴 노매드의 방식은 그렇게 주거지, 정착지를 갖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식 중에 하나로 보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박탈과 상실은 내 의지가 만든 결과는 아니었겠지만 그 후에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는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표현으로 문제 제기는 하지만) 자본과 함께 칼춤을 추며 n개의 거주지를 확보하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에게 내 것을 빼앗겼다며 분노하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떠돌이삶으로 내몰렸다며 비참해하거나 삶을 망나니처럼 망치려고 하지 않는다. 온전히 숨쉬는 자신의 삶을 살고,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소통하고 귀 기울이며, 정당하게 일을 해서 생활을 영위한다. 1개든 n개든 정착지를 소유한 사람들은 안정을 안고 산다면, 정착지가 없는 노매드들은 대신 온 땅을 자신의 거주지로 여기며 자신이 집이 되고 자신 안에 집을 품고 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광석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나만의 집(home)을 꿈꾸었지만 집도, 그 때의 꿈도 상실해버린 펀은 그래선지 서부의 곳곳을 떠돌면서도 바위, 암석에 집착처럼 보일 정도의 시선을 둔다. 그 돌에 자신이 꿈꾸던 집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영혼이라도 깃든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밟고 서고 정착하는 이 땅이 바로 그 돌이다. 혹자는 노매드의 삶이 서부시대 개척자의 정신이 깃든 것이라고 하지만 본질은 다른 것 같다. 개척자는 정착지를 소유하고 점령하기 위해 떠돌았다면  노매드는 소유와 점령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집이 잠시 머물기 위해 그 땅을 빌려쓰는 것이다. 자본의 기회를 노리며 n개의 거주지를 소유하는 사람들이 개척자에 가까운 게 아닐까. 어차피 지구라는 땅덩이에 잠시 머무르는 임차인인 주제에 소유의 탐욕을 부리고 개발의 이름으로 자연을 훼손하는 선택을 하는 삶들에 비추자면 이 노매드의 삶은 개척자가 아닌 순례자의 길 같다. 그리고 그 길위에서 그들은 선구자(뱅가드)다.



노매드들에게 영원한 작별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떠돌다보면 언젠가는 길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길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산다. 잊지만 않는다면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상실은 너무 아프지만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므로 현재를 함께 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또다시 노매드의 길을 나선다. 진짜 집을 품고 스스로 집이 되어가는 선구자(뱅가드)의 길, 영화 <노매드랜드>다.



*영화 속 음악은 루드비코 에이나우디가 담당했다. 최근 <더 파더>의 OST에도 참여했고, 우리 영화 <더 킹>과 <무한도전-'북극곰의 눈물'편>에도 사용됐던 음악을 만든 주인공이다. <노매드랜드>에 사용된 음악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니어서 올해 오스카 음악상(오리지널 스코어 부문)에 후보 지명되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이끄는 주인공 중에 하나가 루드비코 에이나우디의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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