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캐럴이 흐르고 하얀 눈이 내리던 서늘한 겨울밤, 빈센트는 집단 폭력으로 사망한다. 아들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마을 사람들의 혐오와 비난을 피해 이사한 아니타. 이사 전부터 그러더니 이사 후에도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한 청년이 계속 눈에 걸린다. 여느 해와 달리 더위가 일찍 찾아온 부활절, 아니타는 집 근처를 계속 서성이던 청년 데이비를 마침내 작정하듯 불러내 집으로 들인다. 의심과 질문, 경계의 공기 속에 두 사람은 빈센트라는 교집합에 서서히 가까이 다가가고 결국 진실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그 날의 진실이 무대 위를 장악한 폭풍 같은 수 십분 간, 무대는 엉망이 되고 부서진 것들의 파편이 차가운 침묵 속에 두 사람의 상처를 찔러 피를 철철 쏟아낸다.
아들을 잘 알지 못했던 어미와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인 청년이 이끄는 두 시간의 극은 서서히 끓어올라 끝내 뜨거운 폭탄을 관객의 품에 던진 채 침묵으로 끝마친다. 망자의 한, 그리고 그 죽음의 진실을 전하고 전달받는 주체들의 타는 애가 뿌리는 화두는 온전히 관객이 극장 밖 세상에서 풀어내야 할 과제가 된다.
<에쿠우스>의 폭발적인 무대를 봤던 때가 떠올랐다. 후반 데이비가 진실을 쏟아낼 때가 특히 그렇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쏟아내고 송강호는 리액션으로 앙상블을 이룬 것처럼, 이 연극에서 청년 데이비는 쏟아내고 중년 여성 아니타는 리액션으로 중심을 잡는다. 그런 면에서 특히 20대 젊은 남자 배우가 연기의 에너지를 실험하고 도전하고 폭발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국내 초연으로 아는데 이후에도 20대 남자 배우가 가장 탐낼 캐릭터가 될 것 같다.
작년 부활한 백상예술대상 연극상을 거머쥔 신유청의 연출만으로도 예매를 하게 만든 연극. 원형 무대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의 (무대를 바라보고 왼편인) A구역에서 봐서 배우의 정면보다는 측면과 후면을 마주하는 때가 더 많았지만, 클라이맥스에서 비로소 배우의 정면과 첫 대면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해서 꽤 짜릿했다. 각 배우별로, 원형 무대의 각 객석 별로 어떤 에너지를 전달받을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폐막 전에 다시 찾고 싶은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