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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Bigstar Aug 08. 2017

오늘만 살 것처럼
두려움 없이 욕망하는 여자

<레이디 맥베스> 150년이 지나도 남아있는 것



욕망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가능성을 품고 기회를 틈탄다. 한 번의 용기로 기회가 허락되면 욕망이 터져 나오는 것은 한순간이다. 어려울 것도 없다. 순식간에 모든 금기를 깨부수는 파격이 이뤄진다. 그런데 모든 것이 깨져버린 후에 행복이 남아있을까.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자유롭게 피어오를 가능성을 품은 여인이 자신을 억누르는 억압에 저항하는 본능적인 용기로 모든 금기를 깨어버리는 이야기다. 19세기 영국, 17살의 나이에 아버지뻘 되는 나이의 남자에게 팔려오듯 시집 온 캐서린(플로렌스 퓨)의 삶은 숨이 막힌다. 결혼 첫날부터 자신의 몸에는 손도 대지 않고 혼자 수음하는 남편, 자신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려는 시아버지와 함께 이상스러운 저택 생활을 하게 된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저택을 비우게 된 어느 날, 하인들의 왁자한 소리에 끌려 헛간으로 갔다가 거친 야생마 같은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에게 빠져든다. 통제할 것 없이 세바스찬과의 정사에 빠져드는 캐서린을 보는 불안한 시선이 하나 있다. 하녀 애나(나오미 아키에)의 시선이다. 세바스찬을 사이에 두고 미묘한 관계가 되지만 계급적 우위를 지닌 캐서린의 욕망 앞에 애나는 달리 대항할 길이 없다. 다시 저택에 돌아온 남편과 시아버지의 눈에도 캐서린의 욕망은 감춰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욕망은 파괴력을 지니고 캐서린을 괴물로 만들어간다.



결혼식의 캐서린
캐서린과 세바스찬
하녀 애나의 시선


"우리는 살아서는 헤어질 일이 없을 거야." 

코르셋을 찢어발기며 괴물이 되어가다


캐서린은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사랑하고 욕망에 충실한 여자가 된다. 그녀에겐 욕망을 따르며 실천하는 것이 곧 계급인 것처럼 느껴진다. 세바스찬은 하인이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되면서 더 이상 하인이 아니다. 세바스찬과 같은 하인이지만 도덕과 양심을 중시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애나는 캐서린에게는 더더욱 하인일 뿐이다. 

캐서린은 애초에 자신을 억누르고 옥죄는 것에 대해 기가 죽지 않는 당당한 여자이기도 하다. 그녀를 옥죄는 시아버지의 강압이나 밤마다 그녀의 나체를 훔쳐보며 수음하는 남편의 변태성은 캐서린으로 하여금 오히려 그들을 발아래의 계급으로 내려보게 만든다.      

그 저택의 이상스러운 사람들이야말로 캐서린의 욕망이 그 저택을 지배하게 만든 장본인들 인지도 모른다. 내 자유로운 사랑을 방해하는 사람도, 그 사랑에 흔들리고 배신하는 사람도 가만 두지 않는 통제 불가능의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시아버지와 캐서린의 식탁
캐서린과 애나 그리고 세바스찬


연극적인 연출로 관객을 조이다


영화는 캐서린이 자신을 옥죄는 코르셋을 찢고 자유롭게 욕망하는 모습을 담아내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은 코르셋으로 가두듯 단단히 조인다. 그래서 온전히 코르셋을 찢어발기며 괴물이 되는 캐서린의 심리적 변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런 몰입을 이끄는 힘은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가 선택한 연극적 화면 구성과 연출 방식에 있다. 자신이 연극 연출가 출신이기에 그 장점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도 발현하고 싶은 것이 감독의 의도였겠다. 그렇다고 아무 이야기에나 그 방식을 갖다 붙이는 것은 효과적일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레이디 맥베스>에는 그의 연극 연출가다운 고집과 장점이 걸맞게 보인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리딩하고 마치 연극 리허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를 하게 한 후 본격적인 영화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촬영도 시간 순서대로 진행하고 그날그날의 촬영분을 바로바로 편집하면서 배우들에게 편집본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 덕에 배우들은 감정선 컨트롤을 하면서 캐릭터의 심리 변화를 체화했을 것이다.


캐서린의 코르셋을 조이는 애나


<레이디 맥베스>가 가장 연극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은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영상의 느낌이다. 인물을 정중앙에 위치시키고 고정된 카메라로 180도 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잠그는 효과를 일으킨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한다는 캐서린에게 시아버지는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한다. 창문을 여는 것조차도 금지하는 뉘앙스다. 그런 억압 속에서 캐서린은 하나하나 금기를 깨나 간다. 창문도 열고, 자유롭게 들판으로도 나간다. 집 안에서 화면 정중앙에 놓인 캐서린의 정면을 마주하며 시각적으로 고립됐던 관객은 캐서린이 들판으로 나갈 때에서야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캐서린의 눈에도 보일 뻥 뚫린 광경을 상상하게 된다. 그 순간에 카메라는 그녀를 따라 움직이지만 그저 그 몸에 종속된 것일 뿐 여전히 풍경을 비추는 여유를 부리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나마 잠시 관객의 시야를 뚫어주는 캐서린의 자유로운 순간의 맛에 극장에 앉아있는 89분의 시간 동안 길들여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관객이 심적으로 동조하고 응원할 수 있는 캐릭터는 단 한 사람뿐이다. 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캐서린이다. 

연극적인 연출로 캐릭터의 심리 변화를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고, 연극적인 화면 구성으로 관객의 시선을 완벽하게 고립되게 만들면서 괴물이 되어가는 캐서린에 몰입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영화 안으로 성공적으로 가져왔다.  


시아버지의 통제 앞에 캐서린
만찬 테이블 정중앙에 놓인 캐서린


창 밖을 바라보는 캐서린


선량한 얼굴로 괴물이 되어버린 여인 


영화는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영국을 무대로 각색한 작품이다. 1865년에 출간된 소설의 원래 제목은  [무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으로 러시아 무첸스크 지역에서 실제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기록한 기사를 모티브로 쓰인 작품이라고 한다. 시아버지를 납 끓인 물로 죽인 사건으로 당시 러시아 사람들이 선량한 얼굴의 악마 같은 살인자를 '레이디 맥베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쓰인 지 150년이나 지난 이야기는 2017년 현재에도 유효하다. 억압이 각 개인의 욕망을 비틀어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그때에나 지금에나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남아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의 욕망대로, 뜻대로 해버린 캐서린은 이제 행복한 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녀를 옥죄는 코르셋을 입고 있어도 이제는 갑갑해 보이지 않는 그녀는 마침내 자유로워진 것일까. 이미 그녀의 주변은 깨져버려 엉망이 되었고 아무도 머물지 않게 되었다. 자유를 얻었겠지만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캐서린의 이 끝 역시 비극으로 느껴진다.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죄라면 그것이 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남아있다. 21세기 현재에도 캐서린은 우리 안에 그렇게 살아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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