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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허물인생 20화

허물인생(20)

자존심에서 자부심으로

by 강도르

정치질

학군단 생활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들 중 하나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리를 지어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정치질 같은 것이었는데, 딱히 서로 다툴만한 밥그릇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심도 있게 다가가 보니 표면적인 것과는 다른 생활이 있었다.


50명가량 되는 동기들끼리 각각 무리를 지어서 서로를 탄핵하는 일들이 있었다. 내가 봤을 때는 크게는 세 개의 무리로 형성됐는데, 첫 번째가 선배들과의 유착관계가 강한 무리, 두 번째는 선배들과는 독립적으로 동기들끼리 뭉쳐서 다니는 무리,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을 무리로 여기서 각자가 삼삼오오 모이거나 중립 완충 무리로 구성됐던 것 같다. 나는 사실상 세 번째 무리로 중립 완충 무리에 속해있었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서 이 세 가지 무리들이 속하는 모임에 한 번씩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보이는 것들이 많아서 굉장히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던 무리는 첫 번째 무리였다.


1년 차 후보생에게 2년 차 후보생은 압도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선배들과의 관계가 좋기 위해서는 신나는 아부 파티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 무리들은 아침마다 선배들의 집까지 자가용을 끌고 태우러 가거나, 술자리를 만드는 등 선배들과 라포를 형성해 갔다. 아니 이미 후보생이 되기 전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각별한 사람도 보였다.


그렇게 형성된 첫 번째 무리는 선배들을 등에 업고 동기들을 억압하거나,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호가호위라고 동기들 사이에서는 이 무리들은 얄미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선배들의 세찬 공격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학군단 생활의 난이도는 현저하게 낮아진다. 물론 그런 특혜 같은 것은 받아본 적도 없지만 날이 갈수록 허리가 굽어지고 표정이 어두워지는 동기들과는 대조되는 당당한 자세와 목소리 톤 만으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와 목격담도 많아서 작은 사회의 패악질을 감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합리의 끝판왕.


나누어진 무리가 대립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고요한 전쟁


위에서 말한 첫 번째 무리와는 다르게, 두 번째 무리에 직접적으로 속해있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동기들에게 호의를 보이는 무리였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았고 종종 술을 마시는 자리에 같이 껴서 이야기를 한 적도 많았다.


이 친구들은 불합리한 선배들과 동기들의 모습에 불만을 품고 하소연을 위해서 술자리를 만들다가 그들끼리 의기투합한 것 같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선배들의 눈을 피할 절묘한 장소까지 가지고 있어 더욱 놀랐다.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동기들끼리 잘 지내자'는 것을 전제로 학군단 내에 존재하는 작은 이권(자치근무자 자리 또는 선배들로 받게 되는 혜택등)들을 독식하는 첫 번째 무리들을 지탄하려고 모이는 것 같았다. 물론 이 무리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합리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생활이 반듯한 친구들이었던 데다가, 나에게도 호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나 또한 이 두 번째 무리에 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과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여있었고, 여기저기 이야기를 듣기에는 나의 물에 물 탄 듯 경계선 없는 스탠스가 편했기 때문에 소속감이나 적극적인 동참은 꺼려했다.



동기들이 대립보다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입장이었지만, 각각의 이해관계가 많이 달랐고 생각보다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골도 깊었기 때문에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봐도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때 내가 학군단의 동기들을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일은, 태권도 승단심사를 도와주는 일 정도였고, 영향력이 있는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동기들은 서로가 서로를 무리 지어 비난을 했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은 충돌은 없었다.


물론 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난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참상을 겪어보지 못했을 뿐이었겠지만, 학군단 내에서 자치 근무자로 일을 했던 동기들은 좀 더 직접적이고, 더러운 꼴을 많이 봤을 거라 생각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학군단에는 애착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의 눈앞에 일이 급급했던 것도 있지만, 당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던 탓도 있었다.


이렇게 어지럽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후보생들의 가장 큰 과제인 입영훈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보생으로서의 삶 : 입영훈련

학군단의 동기들끼리의 상황은 인간의 감정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거였다면, 후보생으로 해야 하는 일들은 해야만 했다. 대표적인 것을 말하자면 입영훈련이 있다. 입영훈련은 후보생이 된 대학생들이 방학이 되면 군사훈련을 받으러 가는 것을 말한다. 입영훈련은 항상 혹서기, 혹한기에 실시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가혹한 훈련이었다.


무더운 날씨도 날씨였지만, 약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계속된 훈련은 후보생들에게 많은 피로감을 주었다.


그나마도, 동기들과 함께 입영훈련을 받았다면 부담감이 덜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입영훈련이 시작되면 전국의 학군단 후보생들이 훈련소에 입소를 한 후, 임의로 소속을 재배정받아 전혀 알지 못하는 동기들과 함께 훈련을 받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장소, 새로운 인물들과 함께 고강도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도 많았고, 그런 일들을 풀어서 이야기해 보자면 지금에야 추억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불지옥이 따로 없었다.


훈련은 기본적으로 일과를 정해놓고, 정해진 과목들을 배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교육대대를 편성하여 각각 소대를 배정받고, 대대 또는 소대마다 밀어내기 방식으로 훈련을 받았다.


1년 차 후보생은 기본적으로 병사들이 배워야 하는 전술적인 개념으로 훈련을 받는다.


사격술 훈련, 수류탄 투척, 각개전투 등 병사들이 받는 훈련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문제는 교장 이동에 요구되는 것들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교장 이동은 기본이 완전군장이었고, 거기다가 20kg 모래사낭을 넣고 이동해야 하는 것이 전제되었다.


하루 1시간이 넘는 시간을 완전군장으로 이동하는 데 소비했고, 그나마도 급수나 배식 또한 원활하지 못해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제공받아야 하는 것들을 받지 못한 채로 훈련을 받기 때문에 정말 고된 시간이 계속됐다.



기억에 남는 장면을 손에 꼽으라면, 이름 모를 동기들이 급수를 하다가 너무 목이 마른 나머지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나왔고, 이걸 가지고 시비가 되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웠던 모습 등, 재난 영화에서 볼법한 장면들을 봤다.



힘들어 죽겠는데 기운도 넘치지라는 생각이었지만, 말려야겠단 생각보다 스스로의 자제력도 없는 녀석들이 어떻게 장교가 되겠단 거야?라는 의문에 그냥 지도 교관에게 걸려서 제적이나 당했으면 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앞뒤 좌우로 동일한 처지의 동기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 의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에는 얼굴도 이름도 낯설었던 동기들이 점점 의지할 만한 동료들로 변해갔고, 아침에 일어나서 열심히 모포와 담요를 개면서 서로가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하는 동기들의 모습은 아직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평가와 훈련의 연속으로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한계에 많이 몰려있었지만 그 기억이 결코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어차피 지나면 이겨내 버린 고난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다 끝났을 때의 이야기, 날씨는 더 더워지고 훈련은 계속됐다.


자존심


각개전투 훈련 때였다. 각개전투는 전투를 할 때 총탄을 피하면서 목적지로 이동한다는 것을 전제로, 사실 말이 이동이지 그냥 목적지까지 언덕을 기어가는 일이 대부분이다.


목적지까지 당연히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없기 때문에, 중간중간 철조망, 우회로, 교전 상황 등을 설치해 두고 훈련을 진행했다.


훈련이 진행되면 될수록 피로가 누적되기 때문에, 몸이 말을 안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부사관 또는 병사들로 구성된 교관들이 우리들을 자극하는 말들을 많이 했다.


"장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엎어진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같은 말들이었는데, 한 번은 극한에 몰린 내가 이런 말을 듣자 눈이 뒤집혀서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기어 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심하게 기어 다녔는지 팔꿈치와 무릎에 엄청난 찰과상을 입었다,


찰과상이 심해 화상까지 입어서 흉터가 남아있지만, 나를 도발했던 교관으로부터는 인정한다는 눈빛과 박수를 받았기 때문에 나름 만족했던 사건이었다.


이런 독한 행동들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향상심과 자존심이었겠지만, 이것을 내가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자부심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떤 교육도 열외 하고 싶지 않았고 우수하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할지언정 뒤처졌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청각이 예민했던 나에게 사격 또한 쉬운 일이 않았다. 총을 쏘면서 들리는 굉음은 내 자세를 흐트러지게 했고,


사격술 원리도 이해가 잘 안 갔지만, PRI는 왜 하는지도 모른 채 의미 없는 자세를 반복했다.


K2 소총을 몇 번이나 겨눠보았지만 당최 어떻게 해야 명중을 하는 건지 이해도 안 갔었다.


사격을 처음 하는 사람은 다 나와 같지 않을까 했지만, 전국에서 모인 동기들 중에서도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사격술을 습득한 사람도 많았다.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존재를 눈앞에서 확인하니 내가 더 작아지는 느낌이었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영훈련서 일정 수준에 도달되지 않으면 제적 위원회에 올라가거나, 퇴소를 한 후 다시 2차 입영훈련에 입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했다.


매번 입영훈련이 끝나고 나면 후보생들을 성적순으로 석차를 정하고, 이를 통보해 줬다.


나는 그냥 무난한 반 통이었다.


이해력이 뛰어나거나, 우수한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의지만으로 어떻게 보통의 자리를 지켜낸 것이었다.


기뻤다기보다는 안도의 한숨과 분함이 가득 차 올랐다.


앞으로 남아있는 2차례의 입영훈련에서는 꼭 우수한 성적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영훈련 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리 학군단 동기들의 모습에서 많은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계입영훈련이 끝남과 동시에 학군단 생활은 전반적으로 많이 달라지게 됐다.


거기에서 오는 변화와 갈등도 기록해두고 싶은 일중 하나이기 때문에 기록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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