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인생 (35)

회의감과 냉소주의

by 강도르

적응


부대에서 생활을 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추운 날씨가 잦아들면서 봄이 왔고, 봄이 옴과 동시에 나는 중위로 승진을 했다.
대략적인 생활의 흐름이 이해가 됐고, 할 수 있는 일과할 수 없는 일들이 분간이 됐고, 부대 내에서 입지도 올라갔다.

중대장이 전역 준비에 들어가서 대리 중대장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아직은 좀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주변의 선배 장교분들이 챙겨주고 도와줘서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중대원들과의 사이는 여전히 어색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얼굴을 계속해서 봐야 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크게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웃으면서 대했다. 가면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나를 신분이라는 것을 이유로 선을 긋는다면 나는 그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려 했다. 각자의 선에서만 지낸다면 불편할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체력이라는 것을 무기로 삼아야 했다. 내가 그들을 압도적으로 상회하진 못했지만 그들도 나를 압도적으로 상회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큰 무기가 되지도 않았고, 나도 그들을 기본적으로 인간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큰 트러블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그들과 신분이나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친해지고 싶었던 나만이 있었기 때문에 어색하거나 불편했던 것들은 오로지 나만의 기분이었을 것이다.


본질



가면을 쓰면서 생활해나가는 것은 힘들었다.
그럼에도 중대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중대원들과의 살가운 관계는 포기했지만 중대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들의 요구사항에는 항상 귀를 기울이면서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것이 나의 장교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들에게 많이 삐졌었던 것 같다.

잘 지내고 싶지만 그게 내 능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 심통이 나 있던 그런 느낌.

한번은 이런 내 마음 상태를 잘 알게 된 일이 있었다.

중대가 일주일 동안 부대 내 경계근무를 하는 날이 있었다.

서로가 시간이 되면 교대를 해가며 경계근무에 들어갔기 때문에 퇴근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중대원 중 한 명이 고열 증상을 보이면서 복통을 호소했다.

얼굴의 안색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지휘계통으로 보고를 하고 의무실로 진료를 보내야겠다 생각을 하던 차에 다른 중대원들이 제발 의무실이 아닌 병원을 꼭 보내달라며 요청을 했다.

의무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보고를 하면 대수롭지 않게 의무실로 보내려고 드는 상관을 생각하자니, 갑갑한 기분이 몰려왔고 보고 없이 행동을 하자니 군인으로서는 실격인 행동이었다.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보고를 한다는 선택지에 쉽사리
마음이 가지 않았다.

중대원의 상태를 확인하던 중 갑자기 호흡이 이상함을 느꼈고, 나는 다른 중대원 중 한 명에게 급히 119신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것은 모르겠고, 더 지체하면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것만 같았다.

부대 내부로 119 구급차가 진행하려고 하자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

지휘 통제실로 가서 구급차가 부대 내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상관은 길길이 날뛰었다.


어떤 미친놈이 부대로 119를 부른거야?

상관은 기자들에게 무슨 먹잇감을 주려고 이런 생각 없는 행동을 했냐며 119를 그대로 회차시켜버렸고, 그것을 본 나는 자가용 차량을 가지고 있는 선배 장교에게 인근 병원 응급실로 중대원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곤, 그길로 이 사태에 대한 문책을 받았다.

'누가 119에 신고를 한 것이냐'라며 길길이 날뛰는 상관에게 제 지시로 중대원 중 한 명이 신고를 했다고 설명을 했고, 긴급했기에 필요한 행동이었다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 상관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욕설을 내뱉었다.

부대 내의 상급 장교들은 내 행동을 군인답지 않음을 이유로 비난했고, 선배 장교들은 왜 본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냐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모두가 교대로 근무가 돌아가는 경계근무 특성상 생활의 피로도가 높은 상황에서 선배 장교들을 번거롭게 하기 싫었고, 대리 중대장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내 스스로가 해결하면 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이 상황에서 내 본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길길이 날뛰는 상관을 보고 있었을 땐 무섭기도 했지만, 왜 나에겐 자가용 차량이 없었을까

선배 중대장들은 다 차가 있어 끌고 다녔는데라는 생각의 비중이 컸던 것 같다.

나에게 차만 있었다면 이런 해프닝이 없이 잘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신분을 내세워 나를 괴롭혔던 중대원들 생각처럼 결국 나도 그 신분의 자격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이런 신분 사회에서는 그 신분이라는 틀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허와 실


전역을 하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인기몰이를 했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특전사의 모습이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었을까

내 능력이 모자란 것도 있었지만, 부대 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컸다.

그 괴리감이 내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이 기분이 해소되는 유일한 순간은 훈련을 나갔을 때였다.

불필요한 신분사회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눈앞에 해야 하는 것들을 해나가면 되니까 그것이 좋았다.

훈련을 나가면 묘하게 중대원들도 나에게 친밀하게 다가왔던 탓에 그 기분이 배가됐다.

훈련을 나가면 중대가 나눠져서 행동을 했고 그때마다 중대의 막내들과 함께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막내들은 중대 최고참 부사관인 선임담당관의 험담을 엄청나게 했다.

구구절절 공감 가는 내용에 곧잘 웃곤 했는데

그 리액션이 좋아서였는지,
본인들의 속풀이였는진 알 길이 없었지만, 그렇게 신분으로 구분 지어 너는 너 우리는 우리라고 말하듯 느껴지던 '우리'라는 것이 사실상 모래로 지은 성이구나라는 게 느껴져서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결국, 이런 인간관계의 연속일 뿐인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곧잘 친구들이 보고 싶어지곤 했다.


딱히 여자친구도 없었고, 힘이 들 때 의지할 만한 생각이 필요했는데 압도적으로 가족은
아니었고, 그냥 친구들이 많이 떠올랐다.

이곳도 그냥 누군가의 직장인 장소였을 뿐,

아니 누군가가 아니라 내 직장 그 자체니까
어린애 같은 투정을 계속하고 있을 순 없었다.

애초에 내가 찾는 게 여기에 없었다고 생각이 들고나니 역으로 후련해졌다.

친구와 직장동료를 구분하면 이렇게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기분이 편해졌다.

감정을 섞을 필요도 없고, 그저 필요한 일과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하면 되는 것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해야 할 일들도 명확해졌다.


나는 진급을 하고도 동기들이 본부로 들어가 보직을 변경할 때도 중대에 남아있었다.

전역할 때까지 중대에 남아있기로 결정하고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전역하기 전에 특전사의 최고봉이 되는 탑 팀 선발전에 나가고 싶다는 그런 막연한 목표가 있다면 이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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