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4.3을 기억하며
제주 사람은 유독 ‘속숨허라(조용히 해라)’라는 말을 많이 쓴다. 말을 해봐야 도움은커녕 일신의 위협만 받고 가족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었다. 1948년 4월 3일, 3만 명의 죽음. 국가권력의 폭압으로 무참히 몰살당했던 그 역사. 70년이 넘도록 그들은 조용했다. 무서워 울지도 못했다. 두려움에 아버지,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못했다. 옆집 '삼춘'의 비극을 애써 모른척했다. 그렇게 ‘호썰 속숨헙써’, ‘좀 조용히 해’라고 했다. 제주 사람은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살암시난 살앗주’, ‘살암시민 살아진다’라고. 말을 삼키며 살다 보니 그래도 살게 되었다고.
4.3 해원상생 큰 굿이 열렸다. 험악한 세상 만나 들로 산으로 굴속으로 바닷속으로 내몰렸다. 이리 휘둘리고 저리 몰아쳤다. 어찌 살아남은 사람조차 산 게 아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오라방과 누이, 아방과 어멍, 서방과 각시, 삼춘과 고모님, 물애기의 이름을 일일이 불렀다.
“잘도 곱닥헌 우리 애기, 보구정허다.”
살아남은 자의 눈물 수건은 흥건하고 제단에는 망자를 위한 저승 돈이 쌓인다. 속숨할 일이 아니다. 70년 맺힌 눈물을 더 크게 왈칵 쏟고 비참의 시간을 증언해야 한다. 왜 그랬는지 말하고 밝혀야 해원상생이 가능하지 않은가. 10년 뒤, 그 할망들이 살아 있을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시인 이종형은 4월의 섬 바람에 대해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묻는다.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에서 온다고 했다.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에서 온다고 했다. 그래서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이었다. 제주 4월의 바람을 맞이하는 일은 참 쓸쓸하다. 고통스럽다. 제주 중산간의 까마귀 떼는 소름 돋는 죽음의 전조다. 다랑쉬오름의 바람, 사려니숲과 거문오름의 봄 야생화, 정방폭포와 서우봉, 송악산과 알뜨르 비행장, 한라산의 절경은 모두 학살의 장면과 겹쳐있다. 아름다운 곳마다 학살터였다.
‘정명(正名)’, 이름을 바로 세워야 한다. 4.3 평화공원의 추모비는 아무런 글귀가 없는 ‘백비(白碑)’의 상태다. 아직도 4.3의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4.3은 공산주의자의 폭동이거나 어쩌다 발생할 수 있는 사적인 일이 아니다. 4.3은 ‘사건’이나 ‘사태’, ‘불의’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학살에 대항한 ‘정의로운 저항’, ‘항쟁’으로 기록되어야 올바르다.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를 쓴, 조국에 살아보지 못한 디아스포라, 작가 김석범은 일갈한다. 이제 우리의 힘으로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찾고 새겨 누워있는 백비를 일으키자고.
가해자는 떳떳하고 피해자는 숨죽였다. 왜 학살의 피해자가 속숨해야 하는가. 왜 4.3 유족대표가 피해자에게 이제 맺힌 한을 푸시라고 말하는가. 4.3 정명은 가해자가 누구인지 밝혀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국가의 역할은 학살의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사죄하며, 4.3의 가해자인 이승만 정권과 미 군정의 행태를 분명히 밝히는 데 있다. ‘해원상생’, 원한을 풀고 더불어 살아갈 일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4월! 제주 4.3은 세월호 참사와 겹친다.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 참사는 ‘속숨허라’는 4.3 비참의 역사와 닮았다. 우리는 오늘, 4.3과 세월호의 백비에 무어라 쓸 것인가. 세월호 떠오르고 동백꽃 다시 핀다. 그래야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