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실험실
"좀 춥지 않아? 보일러 틀까?"
"아직은 괜찮지 않아? 좀만 더 이따가 틀자."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슬슬 월동준비 시작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오늘은 진짜 안 되겠다'하면서 실내온도를 조절한다. 겨울이 시작된다.
겨울이 오면 덜컥 겁부터 난다. 원체 몸이 차서 나도 모르게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한 탓에 여기저기 자주 쑤신다. 게다가 피부도 잘 터서 12월이 되자마자 바셀린을 손등에 덕지덕지 발랐다. 하지만 말라버린 논처럼 매일 발라도 한번 거칠어진 손등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열흘이 지나도록 나아질 기미가 없더니 기어코 갈라지고 상처가 되었다. 마데카솔과 반창고까지 동원된다. 왜 매번 대비를 안 하는 것인지. 좀 한심하다 싶다.
오한이 온 것처럼 으슬하면 바로 기모 옷을 꺼내야 한다. 매년 입고 있는 검은색과 어두운 갈색의 기모바지 두 장을 꺼내 옷장의 제일 잘 보이는 곳으로 옮긴다. 엄마가 홈쇼핑에서 사서 보낸 듯한 목까지 올라오는 티셔츠도 서랍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올해는 마음먹고 기모 티셔츠 3종 세트도 장만해서 교복처럼 입고 있다. 아래위로 기모 옷을 입으면 온몸이 훈훈하고 포근해진다.
기모로 중무장한 다음 담요를 꺼내와 무릎을 덮고 바닥에 앉는다. 보일러의 훈기가 올라온다. 뜨끈해지는 엉덩이를 느끼며 빨래를 갠다. 다 정리하고 나면 귤을 몇 개 챙겨 온다. 따뜻할 때 차가운 귤을 먹으면 그렇게 맛이 좋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보일러의 온기는 '가족과 친구의 애정', 기모티셔츠는 '나를 챙기는 것'이 아닐까. 몸이 추울 때 보일러부터 트는 것과 기모부터 챙겨 입는 것이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추울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가족은 왜 나를 더 사랑하고 아껴주지 않을까?'
'친구가 나에게 자주 연락을 안 하는 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내가 추운 이유, 내가 외롭고 헛헛한 이유를 밖에서 찾았다. 그렇다고 가족과 친구에게 '나에게 더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해 줘!'라고 매번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요즘은 마음이 추워지면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내가 나를 먼저 잘 챙겨야지.'
'나에게 좋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해.'
평소에 가고 싶었던 평양냉면 집에 혼자 가서 야무지게 먹고, 길 가다 발견한 아기호랑이가 수놓아진 겨울 양말도 선뜻 산다. 졸려서 눈도 안 떠지지만 새벽 러닝을 나가고, 다녀와서는 남편이 인도 출장 선물로 사다준 고급스러워 보이는 커피를 내려 마신다.
나를 잘 챙긴 날은 덜 춥다.
보일러가 없는 곳에서는 기모로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것처럼, 밖이 아무리 추워도 나를 감싸줄 '작은 무언가'가 있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지금 재즈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으니, 오늘은 덜 추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