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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렘 Jan 31. 2016

아빠라는 이름

스물일곱의 결심


어릴 적 나는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저절로 '아빠'라는 다소 유아적(?)으로 들리는 호칭에서 '아부지'라는 (아마도 꽤많이 어른스럽게 들리는) 호칭으로 갈아타게 될 줄 알았다.


그냥 어떤 결심을 하지 않아도, 이렇다 할 계기가 없어도. 그런데 스물일곱이 된 오늘 나는 앞으로도 내가 쭈욱-아빠를, 아부지가 아닌 아빠라 불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빠가 갑작스러운 이별로 모든 것을 혼자 해나가야만 하게 되었을 때, 아들이며 딸이며 처제들 또 다른 누군가들이 자신들만의 슬픔에 갇혀 엄마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아빠에게 그 슬픔을 토해내기에 바빴을 때, 그 때부터 아빠는 나에게 아부지가 아닌 영원한 아빠가 되었다.


물론 다른사람이 아닌 자신이 빠진 슬픔에 잠겨있던 건 쉰이라는 적지않은 나이가 다 되어갈 무렵 얻은 늦둥이 딸도 마찬가지여서, 한동안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해가 뜨고 또 지는 하루하루를 외로워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고맙게도 내가 슬픔이라는 물로 가득찬 풀장에서 비로소 고개를 내밀어 세상에 숨을 푸 내쉬는 방법을 익히게 된 어느날까지, 나를 기다려주었다. 비록 그것이 어쩌지 못한 삶의 연장선이었다 할지라도.

서울에서 아빠가 있는 고향집까지 세 시간 왕복 여섯시간의 여정이 고단하지 않은 것은 아빠의 기다림이 여전히, 그 곳에서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꿈 속에서 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함께하는 꿈을 꿈다. 꿈을 꿈다는 게, 꿈꾼다는 게 아니라 꿈을 꾼다는 거다. 어떠한 일말의 의심도 없이, 어떠한 불안이나 이상함도 느끼지  않고 그냥 그렇게 함께 밥을 먹고, 한 방에서 잠이 든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이렇게, 엄마는 조금 아플 뿐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고.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딸래미가 참 한심스럽게, 엄마가 떠나는 꿈을 5년 동안이나 꾸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고.


그 동안 펜을 들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든 엄마의 이야기를 그 실마리라도 풀어낼라치면 눈치없게 눈물이 먼저 흘러 매번 그만둬버리고 말았는데 이제는 스물두살이었던 내가 스물일곱살이 되었고 2010년이던 그 해가 2016년이 되었으니 조심스레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5년 동안 반복해왔던 일들을 그대로 답습하게 될 지도 모르겠고.




어쨌거나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면, 아빠라는 호칭에 대한 결심은 오늘의 작은 에피소드로 시작된 일이다. 아빠의 포도밭 옆 감나무밭 아저씨가 모처럼 집에 오셔서 같이 점심을 먹는데, 아빠가 아저씨에게 "얘만 아니었으면 나도 어떤 결정을 했을지 모르겠어요." 라고 하셨다. (물론 이렇게 점잖게 표준어를 구사하진 않으셨다.) 그리고 몇 해 전 스스로의 결정으로 (애초에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을까) 운명을 달리하신 같은 마을 살았던 어느 부부의 이야길 아저씨께 풀어놓으셨다.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역국에 만 밥을 후루룩거리며 먹고 있었지만, 늘 고향집에 내려올 때마다 '이제 편하다' 했던 아빠였기에 마음 어느 한 곳이 쿵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나는 백날천날 철없고 아빠를 무지막지하게 의지하는 어린 딸래미'가 되어야겠다고. 내 결심이 아빠를 오랫동안 '다정하고, 사랑많고, 굳건하고, 믿음직스러운 아빠'로 살 이유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비록 그게 나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억지라고 할지라도. 내가 지생각만 하는 나쁜 딸래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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