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규정에서 벗어난 자유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7년 만에 잘라냈다. 스치듯이 ‘자를까?’라고 말하면 아쉬운 표정을 짓고 ‘너는 긴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지금까지 짧게 치고 싶던 마음을 잠재웠다. 그렇게 7년, 단호하지 못하게 스스로 후회할까 망설였다. 그러다 새로 알게 된 사실 2가지로 인해 드디어 긴 머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첫째, ‘~가 어울리는 얼굴’이란 없다는 사실이다. 긴 머리, 짧은 머리, 뽀글거리는 머리, 촤르륵 펴진 머리 등 뭐든. 오래 봐온 헤어스타일에 익숙해졌을 뿐이지 특정 머리가 보편적으로 예쁘다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되는 날이면 당당해지고, 반대로 안 예쁘다고 생각되는 날이면 스스로 위축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는 아름답다.
어린 소녀일 땐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감이 넘치죠.
배가 나오든, 춤을 추든, 놀든, 엉덩이가 팬티를 먹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의심하게 돼요.
누군가 중요한 것들을 규정해주고 그 울타리에서 자라죠.
-영화 ‘I feel pretty’ 중에서-
둘째, 보잘것없어 보이는 머리카락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길러온 머리를 파랗게 물들일까, 파마를 할까, 어떻게 해야 기분전환이 될까 망설이던 때, 건강한 모발을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기부할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치장의 도구로 여겼던 요소가 어떤 이들에겐 당당함이라는 선물이 된다는 사실을 안 순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소아암 환자를 위한 가발 만들기에 동참하기로.
위와 같은 이유로 확신 있게 15~30cm가 되는 길이를 잘랐고 그 머리카락의 무게만큼 만족감과 뿌듯함이 쌓였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미소가 번지도록 마냥 예쁘다. 첫 번째 사실을 통해, 아름다움의 기준을 바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사실을 통해서는 만족과 더불어 나눔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몰랐다면, 누군가 만든 규정에 자신을 가두며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고 나누는 행복은 없이 개인의 즐거움만 남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 대신 타인의 반응을 중요시했던 날들의 상징인 긴 머리를 잘라냈다. 자유로운 짧은 머리는 다시 말하고 있다. 어떤 모습이던지 ‘나’는 예쁘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었다는 것. I’m proud to be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