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일하고 노는 그린이의 회사살이 30
오랜만의 브런치. 그간 가장 신뢰한 사람을 상실한 아픔, 작은 감정도 수용받지 못하는 일터에서의 외로움, 하루가 다르게 찾아오는 육체의 고통,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만 잘못 있다 하는 사람에 대한 솟는 분노, 그러나 과거와 미래 생각 없이 현재에 집중하여 얻는 행복, 그 행복의 끄트머리에 이어지는 아린 마음 등 다양한 감정과 감각 속에 시간을 보냈다.
상실의 고통은 무감각하고 늘어져 있던 나를 깨웠다. 지나간 것의 소중함, 모르쇠로 일관해온 딱딱한 껍질 안의 속마음, 어떤 고통을 주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까 하는 가엾은 생각, 그리고 힘없이 지쳐 그저 듣고 있던 목소리.
관계의 불안정 속에 있어서 그럴까, 먹던 약이 달라져서 그럴까? 어느 날엔가 감정대로 행동했다. 공감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나무라는 말들이 쌓이고 쌓여 사무실에서 박차고 나갔다. 달래는 것 같아 보이는 말속에 숨은 질책의 소리를 멈추지 않는 직원 앞에서 통곡했다.
‘봐! 대리님 지금도 내 이야기 듣는 것처럼 하지만 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잖아’
너무나 어리고 여린 아이처럼. 그 아이는 우는 동안에도 자신의 모습이 어리숙함을 알고 있었고 때가 지나 감정이 가라앉으면 나로 인해 불편했을 사람들에게 사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우는 순간에도
‘이봐, 너 지금 대화할 상태가 아니야. 일로 만난 사이이니 일만 잘하면 돼. 우리는 일하는 기계야. 감정 표출하면 다른 사람은 어떻겠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피해 주고 있는 거야’하는 말에 독하게 서러워졌다.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다니. 어쩌면 모든 회사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런 대화가 오가기 전, 사소한 대화에 철저히 차단당했다고 느꼈다.
‘나 너무 힘들어 쉬어야 할 것 같아’
‘응 그래, 그래서 언제 갈 건데?’
‘10월에 가서 11월?’
‘그럼 됐어.’
‘전혀 안 아쉬운 거야? 쳐다보지도 않고’
‘가면 그때 돼서 아쉬워할게’
‘...’
‘대리님 나 힘든데 ㅁㅁ가 대꾸 제대로 안 해줘’
‘너는 내가 힘든 거 알아?’
‘...’
‘치사해, 왜 아무도 안 받아줘’
‘주임님 1시까지 중강당에 프로그램하러 와주세요’
‘...’
위의 대화를 보고, 빈번히 힘들다고 표현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말을 정성스레 수용해줬더라면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회사에서의 쉼(휴직)을 고려하는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다.
‘나’로서 감정을 표출한 상황들로 인해 불편했을 팀원들에게 미안함을 담아 추석 연락을 보냈다. 무안할 정도로 아무 대꾸 없는 단톡을 보며 나는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 마땅히 올라오는 분노를 애써 참는 어떤 것. 추석 연휴 뒤, 혼자 사무실을 지키며 그들의 일을 맡아했던 나의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 내 작은 질문에 무례히 행동하고, 본인의 부탁은 쉽게 하는 팀원들에게 질려버렸다. 마음 열고 좋아했던 직원들 속에 나는 외로워졌고 마음이 점차 떠나간다.
쓰레기라 해도 묵묵히 감싸고 있는 검은 바다 위에 자유로이 파도를 즐기는 서퍼가 되리라.
사회구조가 위에 언급한 대리가 한 말처럼 차가운 공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이전 직장을 떠나온 것과 같은 이유로, 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아무리 일로 만난 사이라 해도) 만나는 이들에게 나는 내 감정을 묵인하고 가면을 쓸 수 없다. 공격적으로 본인을 방어하지만 결국 잡히고 마는 사냥감의 먹이 같은 존재일 수 있다. 그럴지라도 다칠 것을 생각해서 순순히 숨어있다가 가만히 있다가 잡히지는 않을 거다. 조금 더 나를 위해 숨기지 않고 살아 보려 한다. 나는 감정 있는 존재이며, 생각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