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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Sep 17. 2022

자립하겠습니다.

본 글을 들어가기 전,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 나태함을 변명한다.


불특정 소수(?)가 찾는 이 공간에 나의 경험과 생각을 언급하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에게 공감과 희망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회사에 너무나 지쳐버렸고 그런 나의 불평, 불편한 감정은 점차 글에 실렸나 보다. 나의 짐이 다른 이에게 힘듦으로 전해지길 원치 않았다. 내게 정서적 성장이, 무너진 마음건강의 회복이 이뤄지고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다시 글을 써볼 때가 된 듯하다. 한껏 성숙하고 온전히 회복했기 때문은 아니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 힘이 조금은 생겼기에 이후 글의 힘을 빌려 더 튼튼해지기 위함이다. 그러니 우연히라도 글을 읽는 이들이 뿌리내린 땅에 한 움큼의 흙으로 존재하길 바라본다.




‘중심을 잡는 힘’의 시발점은 헤어짐이었다. 이별의 대상은 나의 요구에 응하고자 하고 내 앞에서 효율성을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갈등이 생길 때면 안색이 변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과하게 화를 내곤 했다. 잘못된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표현하는 것을 가만히 보지 못했고 나는 그와 매번 부딪혔다. 그런 그와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주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의견에 귀 기울였다. 누군가가 우린 운명이네 뭐네 하면 그와 하는 연애가 힘들어도 내게 확신을 준 이를 핑계 삼을 수 있을 테니까. 만남을 지속하던 헤어지던 그 결과로 인한 슬픔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기에 선택을 다른 이에게 미뤘다.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선택을 전가하는 나의 발견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평소 책임감 있다고 생각했던  자아와는 다른 모습의 원인을 쫓았다.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로 인해  선택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었다. 연애에서 조차 ‘ 그런 선택을 했냐, ‘네가 자초했다 손가락질받을까 두려웠다.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도 스스로 택하지 못하는 모습을 직면하고는  이상  인생을 다른 이들의 선택에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없으니. 그래, 직접 선택하는 연습을 하자.


스스로 결정하자는 다짐을 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난 곧 서른인데 아직도 부모님 눈치가 보인다. ‘내가 이걸 택하면 엄마 아빠가 싫어할 거 같은데’, ‘내가 이렇게 해야 좋아하실 거야’ 등. 이전에 헤어지고 나서 아무 말 없이 다시 만났을 땐 부모님을 속이는 기분이 들어 매우 불편하기까지 했다. 나의 연애인데 나보단 그들의 만족을 더 생각했다. 사실 부모님은 딸의 만족이 우선이실 텐데도.


정서적 자립을 선포했다. 너무 착하게 자란 거 같다는 나의 말에 아빠는 빵 터졌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 같았다. 묘했다. 딸의 독립선언에 서운하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가 느끼는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 고민이 생겨도 친구같이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다. 나의 엄마 아빠니까 좋은 선택을 알려주실 거라 믿었다. 정서적으로 가깝고 나를 위하며 내 삶에 귀 기울여주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또한 엄마 아빠는 동생 때문에, 일 때문에 힘든데 나는 그들과 별개로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짐을 같이 져야 한다고, 내가 그들의 힘듦을 보상해주고 싶었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그런 거였다.


이제는 나와 부모님을 분리하는 연습을 한다. 분리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요즘이다. 여전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리고 스케줄을 물어보는 대로 답하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서있는 마음가짐으로 마음이 한 겹 더 쌓여 단단해진 듯하다. 자립! 안정감은 내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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