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은 싫어도 자연이 좋아서
애증의 회사. 2022년 꽉 채워서 좋아하시만 싫었던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해 첫 주의 소감은 애증이다. 2023년 새 해가 오고 새로운 날이 펼쳐지길 바랐다. 마음가짐도 다르게 사무실에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도 예쁜 엽서에 적어 책상 한쪽에 놓았다. 그러나 역시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욱하고 욕하는 곳, 끔찍이 다른 곳으로 발령 나기를 바라면서도 사랑하는 곳이다.
첫 주에 욱해버린 사연은 이렇다. 9시 출근하며 기분 좋게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자리에 앉아 하루를 시작할 다이어리도 열지 못했는데 곧 회의를 하겠단다. 회의의 목적은 팀장이 어젯밤 당직하면서 있었던 민원사항을 공유하고 이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처리하라는 것. 처음 든 생각은 '음, 본인 당직했다고 생색내는 건가?'였다. 순한 맛의 민원 수준이었고 하다못해 담당부서에 전달하겠다는 둥 해소할 수 있는 것인데 출근하자마자 각 팀을 다니면서 아주 중대한 사항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꼴 보기 싫었다. 또한 그 업무를 굳이 자신의 팀으로 가져와서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더더욱. 엄밀히 예방하고 해결할 부서는 다른 데니까. 최근 들어 잦게 지원부서 업무가 운영부서로 떠넘겨오는 모습을 숱하게 봐 오니 더 예민했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뒤 다시 팀회의가 열렸다. 또다시 갑작스럽게 불려 가 회의책상에 둘러앉았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직문화 중 하나가 통보식 회의이다. 더불어 예정되어있지 않은 회의면 기본적으로 직원의 불만을 만들고 시작하는 셈이다. 본인 시간에 맞춰서 모든 직원이 움직여야 하는 것은 업무에 있어서 효율성과 만족도를 상당히 떨어트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그렇게 두 번째 회의. 기각 막히는 통보를 했다. 바로 개인의 sns에 회사 홍보물을 정기적으로 올리라는 것! 오롯이 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이 있지만 '모두의 일'이라며 개인계정에 올리고 확인해서 많이 올린 직원에게 상도 주겠단다. 그 순간 터져 나왔다. 내 안의 목소리가. "그건 침해죠" 그러니 팀장 하는 말, "주임님, 침해가 아니죠. 취지가 그렇다는 거예요. 이 정도 할 수 있지 않아요?" 순간 아차 싶었다. 내 의견은 중요치 않다. 말해봐야 입 아픈 건 나인 거였다. 그럼에도 이 글을 빌어 말하건대, 그건 취지를 넘어선 강요랍니다. 몇 달째 읽고 실천하고 있는 책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에서도 요청과 강요의 차이를 말한다. 요청은 거절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것, 거절했더니 울그락불그락 안 좋은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건 강요였던 거다.
오전에만 두 번의 회의를 했다고 팀원들과 궁시렁하는데 11시 또다시 회의에 불려 갔다. 한 시간 간격으로 3번의 회의라니. 회의 내용은 사업 홍보에 대한 것. 그 또한 의미 없이 에너지만 쓰고 왔다. 매사 헌신적인척 말하는 팀장에게 매번 당하고도 매번 기대해 왔다. 주변에선 '아직도 모르냐, 1년을 봤는데 그 말을 믿어?'라고 나를 순진하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욕하면서도 다른 팀에서 우리 팀장을 욕하는 것을 가만 두지 않는다. 그렇게 다른 팀 앞에서는 우리 팀장을 지지하고 응원하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팀원들을 너무나 괴롭게 한다. 애증의 인간이다.
환기할 겸 탐방로 안전점검을 하러 숲으로 나왔다. 나뭇잎을 떨어트리고 휑해진 나무 사이와 하늘 아래엔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춥고 볼 것 없다고 느낀 겨울 숲이 좋아진 건 횡성에 와서부터다. 특히 눈이 많이 오는 특성으로 숲에선 다양한 야생동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깊이를 알 수 없이 수북수북 쌓인 눈 위를 걸으면 그 아래에 어떤 동물이 있을지 호기심이 솟구친다. 귀여운 하트모양과 둥글게 큼직한 모양, 뭐에 긁힌 듯한 모양 등 다양한 동물 흔적이 사람 발자국보다 무수하다.
하트모양은 노루 혹은 고라니 발자국. 아마 노루일 거다. 비슷한 형태의 자국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그만큼 자주 등장하는 동물일 테니. 노루 발자국을 따라가 보면 동글동글 눈 위에 구멍이 난 걸 볼 수 있다. 바로 노루가 방금 누고 간 동그란 똥의 온기로 눈이 녹은 거다. 엉덩이가 하얀 노루는 가끔 운전할 때, 산책할 때 마주치는데 내겐 숲 속 요정 같은 존재다. 그의 흔적을 찾고 나니 아직 나와 가까이 있구나 싶어 더욱 조심하게 된다.
크고 깊게 찍힌 발자국은 멧돼지. 멧돼지는 노루, 고라니, 꽃사슴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크기가 무진장 차이 난다. 그래서 멀리서 보아도 '오, 저건 멧돼지다'하고 알 수 있다. 교육장소보다 위로 올라와보니 샘이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인적이 드문 곳이라 그런지 멧돼지 흔적이 유난히 많다. 발자국만 보고 가다 보면 흰 눈이 누렇게 부분 부분 변색된 걸 볼 수 있다. 멧돼지 오줌. 꽤 이곳저곳에 흘렸다. 멧돼지는 진흙목욕을 좋아한다. 오늘은 어디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싶다.
현재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동물의 흔적을 찾는 즐거움이 있는 숲이다. 조금 더 색다른 것을 찾아보려 집중해보면 앞서 본 둥근 발자국과 다르게 날카로워 보이고 가벼운 발자국이 요리조리 움직인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 흔적은 머지않아서 땅 굴로 이어진다. 쥐일까 청설모일까. 눈 위에서 만나는 흔적은 새롭고 흥미롭다. 토끼 발자국도 얼마나 신기한지, 털 덮인 동물의 발자국이 다 같지 않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새로운 세상인 곳이다.
사무실에서 열받고 퇴사 생각을 심심찮게 하지만 사무실 문만 열고 나가면 펼쳐진 이 환경을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산이라 주변에 문화생활할 거리가 없어서 나의 삶이 무너지는 거 같은 때도 이틀에 한번 꼴로 있다. 그러나 나의 일터는 미세먼지나 코로나 걱정 없이 마음껏 숨 쉴 수 있고 동심으로 돌아가거나 태초에 사는 기분이 드는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내가 익숙한 문화와 바꾸고 있는 건가 보다. 그러니 부디 사무실에서 나의 옆옆자리 팀장에게 화나는 일이 줄어들고 조금만 더 사랑할 수 있는 회사가 되길 바란다. 애증에서 애증애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