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대하여
지난주에 보고 올리려던 영화를 다시 되새겨본다. 개인적인 느낌은 '타오르는 마음을 절제하며 담백하게 담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 어울리는 글 제목을 고민해 보았으나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는 듯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주된 줄거리 외 이야기는 회색처리함.
[캔버스 준비]
배를 타고 가다 물에 빠진 짐을 건지려 망설임 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여인. 그녀는 물에 젖어 무거워진 몸과 짐을 배에서 내려 걷는다. 도착하자 벽난로 앞에서 이곳에 온 목적이 될 물건과 자신을 함께 말린다. 허기를 채우다 하녀를 만난다. 하녀에게 주인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수녀원에 있다가 언니가 죽어 집으로 돌아왔고, 이전에도 초상화 그리기를 실패했다는 이야기들. 다음날, 자신을 고용한 부인을 통해 듣는다. 딸이 포즈 잡기를 싫어한다고. 초상화가 완료되면 결혼해야 되기에. 그래서 화가임을 숨기고 산책 친구로서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 그에, 화가 마리안느는 그림을 완성하여 아가씨가 결혼하러 밀라노에 가게 될 거라며 자신을 보인다.
[윤곽 잡기]
하녀에게 아가씨의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묻는다. 비명 없이 절벽에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가씨를 뒤쫓는다. 어두운 수녀원 복장 뒤 금발이 보인다. 그리고 달린다. 수년간 그려왔다는 숨찬 달리기를. 다음 날도 그녀를 따라 해변가를 걷는다. 아가씨라 하는 그녀는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수영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무엇이 그녀를 달리고 싶게,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하는 걸까. 죽은 언니 이야기가 나오자 마리안느는 '그녀는 죽고 싶었을까?' 하는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받은 아가씨 엘로이즈는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없다며 서로 민감하게 여겨졌을 대화를 나눈다. 더불어 각자의 수녀원 기억, 각자에게 결혼의 의미. 아버지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마리안느에겐 결혼은 선택사항임을 알게 된 엘로이즈는 자신을 이해 못 한다고 역정이다. 그러나 그런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는 덤덤하게 말한다. 이해한다고.
사실 엘로이즈의 엄마는 딸이 아름다운 밀라노에서 지루하지 않게 살게 하고 싶어 결혼을 보내고 싶어 한다. 딸 못지않게 엄마도 외로워 보인다. 자신이 밀라노에서 보낸 시간을 추억하며 딸의 결혼을 더욱 소망하는 듯 보인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루정도 엘로이즈가 홀로 산책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채색하기]
자신에게 하루 외출이 허락됨을 들은 엘로이즈는 성당에 가려한다. 성당의 음악에 대해 논하다 자신이 모르는 음악에 대해 설명해 달라 한다. 마리안느는 말이 아닌 피아노 연주로 음악을 설명한다. 말 수는 적지만 그녀는 마리안느에게 관심을 보인다.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마리안느는 밀라노에서 더 멋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며 이야기를 꺼낸다. 둘의 시간이 쌓일수록 마리안느의 그림이 선명해진다.
성당에 다녀온 엘로이즈는 고독 속의 자유를 느낀다. 더불어 마리안느가 없음도 느끼고. 외출 덕에 초상화를 완성했다지만 마리안느는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해변에 앉아 자신은 화가이며,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그녀가 떠난다고 하고 심통 난 표정으로 물에 들어가겠노라 한다. 그런 엘로이즈를 여전히 덤덤하고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감상과 비평]
자신의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당신이 보는 내가 이렇냐'라고 묻는다. 자신과 그림은 비슷하지 않다고, 생명력과 존재감 같은 어떠한 깊은 감정이 없다고 비평을 한다. 마리안느는 자신을 고용한 부인이 보기 직전 그림을 망쳐버린다. 호기롭게 그림을 완성했다고 했으면서 망친 그림을 보게 된 부인은 크게 실망한다. 집을 떠나라는 말에 지켜보면 엘로이즈는 전에 하지 않던 포즈를 취하겠다고 한다. 부인이 앞으로 집을 비울 5일간 작정하고 그림 그리는 시간이 생겼다. 여인 안에 있는 깊은 감정을 새로이 담을 시간 5일이 더 생겼다.
[새로운 그림]
자신의 생리통으로 인해 우연히 하녀의 임신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를 원치 않아 몸을 혹사하며 해결해보려 한다. 한참 뛰고, 식물을 달여 마시고, 몸을 메달기도 한다. 마리안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걸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사랑에 빠진 경험과 느낌을 묻는다. 이때 쓰러진 하녀 소피를 옮기고, 잠든 아가씨를 촛불에 기대어 그려본다. 캔버스가 아닌 곳에.
이제는 서로의 감정과 행동을 파악한다. 당황할 때 어떤지 등. 서로를 관심 있게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 어느 날은 화가와 모델로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서로의 대화가 늘어간다. 낮에는 그림 그리기, 저녁엔 마리안느, 엘로이즈, 하녀 소피, 여인 셋이서 대화와 카드놀이, 책 읽기 등 추억을 차곡차곡 쌓는다. 책을 통해 말한다. 사랑과 추억과 뒤돌아봄과 탓하지 않은(을) 죽음을.
[어떠한 깊은 감정]
사람이 많은 축제장. 사람들이 공명을 만들며 아카펠라를 한다. 신비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두 여인은 서로를 바라본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묘한 감정을 느낀 그녀들. 끌리고 또 밀어낸다. 함께하는 식사도 거르는 그녀들은 또 한 번 타오르는 별난로 앞에 선다.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꺼내고 입을 맞추며 덮는다.
임신 중이라 이틀 뒤 다시 오라던 곳에 다시 찾아갔다. 소피의 낙태에 함께 있어주려. 다리를 벌리고 누워 생명이 떼어지는 과정에 아이러니하게 소피는 자기 옆에 누인 아기 손을 꼭 잡고 견딘다. 아가는 소피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리고 저녁, 낙태 장면을 재현하며 그림을 남긴다.
[완성]
날이 밝고 이제 엘로이즈는 미소 띤 얼굴로 포즈를 취한다. 그녀들의 두려움은 보이지 않고 사랑에 집중한다. 그렇게 그림이 완성됐다. 지난번보다 맘에 들지만 남에게 갈 테니 없애고 싶은 그림. 둘은 사랑하지만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마리안느는 결혼을 거부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 그러곤 자리를 벗어난 엘로이즈를 쫓아가 용서를 구한다. 부서지는 파도 앞에서. 둘이 서로를 만지고 들을 수 있는 시간도 하루뿐이다. 내일이면 부인이 돌아오고 그림도 완성이니 끝나는 거다. 얼마후면 그림을 보고 그리워할 거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그림으로라도 그리워하기 위해 지금 모습 그대로를 남긴다.
아침, 주방에 웬 남자가 있다. 떠날 날이 된 거다. 초상화를 본 부인은 사례를 하고 엘로이즈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히려 데리고 나간다. 마리안느는 소피와 정든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가끔 상상했던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를 실제로 바라보게 된다. 절박하고도 짧은 포옹 뒤 돌아보지 않으려 뛰어간다. 그러나 엘로이즈가 말한다. "뒤 돌아봐요." 사랑과 죽음과, 죽음을 탓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책 속의 여인처럼. 그렇게 환영처럼 사라진다.
[그리움]
몇 년 뒤 마리안느는 미술관에서 엘로이즈를 재회한다. 한 손에 아이를, 한 손엔 자신을 그린 28페이지가 보이는 책을 들고. 여전히 그리워하는 그녀를 그림으로 본 것만으로도 마리안느는 미소를 짓는다. 공연장에서 맞은편에 있는 그녀를 또 한 번 보게 된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음악, 과거에 그녀에게 피아노로 들려준 힘 있는 음악, 폭풍과 고요를 넘나드는 '자신이 몰랐던 음악'. 엘로이즈는 공연을 감상하며 당시 폭풍과 같던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워하며, 어두운 수녀복을 벗어버리고 웃음 지으며, 지금을 살아가게 한 그 감정을 담아.
영화에서 두 여인은 폭풍 같고도 고요했다. 잔잔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한 파도처럼. 촛불 같은 따뜻함과 모닥불과 같은 뜨거움도 존재하는 그런 이야기.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꼽아본다면 축제에서 모닥불 뒤로 엘로이즈와 눈맞춤하는 장면,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잠들지 말라고 속삭이고는 지난날 숨겼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장면(위에 첨부한 포스터)이다. 두 장면 다 어두운 색감의 배경이지만 오히려 두 인물이 또렷하게 보였다. 시각적으로도 그들의 감정도. 하나는 무언의, 하나는 언어만의 대화로 채워졌다. 짧지만 분명히 느낀 그 사랑을 내가 어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러나 외모나 재력, 아니면 어떤 식습관 등등 단순한 포인트가 좋아서 생긴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 상대를 궁금해하는 것, 그 안에서 대화가 된다는 것, 깊이 상대를 알아가고 있음에 기쁨을 느끼는 것. 그런 게 행복을 채우고 마음을 채웠을 것 같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솟구치며 타오르는 불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을 거 같다. 그들이 두려움과 사랑, 마음에 없는 소리와 용서를 구하며 번복한 것처럼. 돌아보면 죽을 텐데도 돌아보라 말하는 그 어느 날의 책의 여인처럼.
이 식물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불타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특징과 같은 초록과 빨강의 조화를 지닌 식물. 마치 수녀복이 벗겨지고 금발의 엘로이즈가 나타난 장면과 흡사하게 다가온다. 가시가 있고 크게 주목받지 않는 듯하나 이 겨울 화려하게 피워내는 게발선인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