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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현 Sep 30. 2024

04. 이 책의 시선으로 카이스트 청강을 신청했다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어린 시절에 별다른 사춘기를 보내지 못해서인지, 다 커서 몇 번의 큼직한 방황기를 겪었다.

나에게 있어 방황기는 어쩌면 황금기이기도 했다.


첫 번째 방황기는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왔다.

나는 1년간 휴학을 하였고, 남들은 희안하다고 여길지 모르는 나만의 버킷리스트들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카이스트 청강이었다.

물론 나는 어릴 때부터 일편단심 한의학이 일 순위였지만, 과학의 도시인 대전에서 양질의 과학교육을 받으며 초중고를 보냈기에, 카이스트의 생명공학도 삶은 나에게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공계 과목의 청강을 하면서, 카이스트에 578억을 기부한 원로 한의사의 뜻도 이해가 되었고, 내 길은 아니었지만 함께 수업 들었던 과학도들을 여전히 응원한다. 아무튼 이때 나는 한의대 커리큘럼에 들어와도 어색하지 않을 강의를 하나 찾게 되어서 신기하고 기쁜 마음으로 청강을 신청했는데, 역시 나에겐 이 강의가 가장 흥미로웠다. 바로 신동원 교수님의 [과학기술학 특강, 몸과 의학의 한국사]였고, 교재는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였다. 아래는 당시에 레포트로 제출했던 서평을 줄여보았다. 호랑이 기운이 느껴지는 책과 방황기 때 주고받은 시선이라 그런지 약간 거칠게 느껴진다. 한의대에서는 본과에서 임상 병리학이나 해부학, 영상의학 등을 배우기 전에, 예과에서 인의예지신을 바탕으로 한 동양철학을 배운다. 우리 학교는 논어를 통으로 외우게 시켰는데 그때는 내가 왜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를 꿈에서 까지 외우고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지나 놓고 보니 그 또한 의료 윤리의 자양분이 되어준 게 아닐까 싶다.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서평

                                                                                                                    오지현


의학이 눈이고 한국사가 우주라면, 신동원 교수는 감로탱, 소설, 판소리, 고문서 등 다양하고도 배율 좋은 망원경을 갖추었다. 이렇듯 다각적이고도 심층적인 접근방식은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본문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_ 고통 받는 몸의 역사

2부_ 역사 속의 의료생활

3부_ 한의학이냐 서양의학이냐


1부는 일곱 장, 2부와 3부는 다섯 장으로 나뉜다. 각각의 장은 하나의 글이지만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소제목이 붙어 있어 이해를 돕는다. 길고 짧은 글을 적절히 배합하여 독자가 너무 늘어지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특히, 나에겐 2부 5장의 테마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 오해의 역사를 바로잡는다 (2부 5장)


신동원 교수는 서문에서 5장,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덤'으로 표현했다. 나에겐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글이었다. 서두에서 저자도 궁금해 한 물음 -인술과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내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다. 의료 환경의 전반적인 개선, 의사 환자 간 민주적인 관계 등도 물론 중요하지만, 글쎄 그것만이 다는 아닌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것은 비록 변화된 사회에서 윤리의식이 한국 사회의 의료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지라도, 인술과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도덕심 자체를 버려서도 안되고, 완벽한 법이 있더라도 도덕을 함양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의료제도나 의술내용의 역사는 어느 정도 들어보았는데, 의료윤리를 역사적으로 다룬 것은 처음이라서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유교적 의학윤리를 다룬 의서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원래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다르다는 것은 이 책을 보고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다. 1955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시작한 이후 유명해졌는데, 이 선서는 바로 히포크라테스의 권위를 붙인 세계의사협회의 제네바 선언 내용이었다. 지금까지도 이것이 의사윤리의 상징이 되고 있다.


개항 이후 일제시기의 의사윤리의 전반적인 성격은 전통적인 인술 윤리가 서양의술을 둘러싸는 모습을 띠었다. 심지어 서구의 기독교 정신과 적십자 정신에서 보이는 박애와 자선의 윤리까지도 인술 안에 포섭했다. (255면, 돈 버는 의사가 되지 말고 병 고치는 의사가 되라)
현대 한국인들은 숭고한 인술, 무차별적 의술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언급하게 되었다.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과대학에서 행하는 강령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기왕의 인술윤리를 흡수하여 의사윤리의 상징물이 되었다. (259면,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둔갑한 제네바 선언)


저자는 한 페이지 텀을 두고 히포크라테스선서와 천금방의 의사윤리를 실어 시각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끔 배려했다. 9개의 조항으로 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환자의 진료에 최선을 다하며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위해 힘쓴다"라는 원칙을 주로 반영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한 조항도 있지만 의사 조직의 폐쇄성도 드러났다. 학습한 지식을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은 의학지식이 특권인 시대에 기득권유지를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원글만 비교하고 보면 천금방의 의사윤리가 보편적 측면을 포괄적으로 짚고, 현대 윤리에 비해 손색이 없을 만큼 더욱 훌륭했다.


... 훌륭한 의사는 병을 치료할 때에 반드시 정신을 안정하고 의지를 든든히 할 것이고 어떠한 욕심이나 바라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먼저 환자에 대한 자비롭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발휘하여 사람의 고통을 다 구원한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 환자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고 깊은 동정심을 가져야 하며 ... 반드시 세밀하게 따져보고 깊이 또 널리 생각해야 한다. 생명이 위급한 때에 급히 서두르거나 명예를 얻으려는 행위는 '인'의 정신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 이름을 날리는 데 정신을 팔지 말고 다른 의사들을 비난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덕에 긍지를 갖는다. ... 의사가 자기의 좋은 기술을 뽐내거나 돈벌이에 정신을 쓰지 않고 오직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생각만 한다면, 은연중에 스스로 많은 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249면, 의방유취에 인용된 천금방의 의사윤리)


윤리 문제는 어쩌면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되기 전, 순수한 열정과 인류를 위한 학문 발전에의 꿈을 가진 새싹들이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문적 지식의 측면에서는 부족하더라도 중립적 의견을 낼 수 있고, 그들 스스로도 진정한 의료인에 입문하기 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게 될 테니 말이다. 의대, 한의대의 예과 2년은 본 학문을 배우기 전 기본 소양을 함양하는 시기이다. 특히나 의료윤리시간에는 암기 위주의 수업보다는, 좀 더 본질적이고 개인과 학문 발전에 도움이 되는 수업이 이뤄져야 하겠다. 그렇게 신선한 마음가짐으로 발전시키다 보면, 후학들 중에서는 진정으로 실력도 있고 마음가짐도 바른 '대의'가 나오지 않을까.


의료는 의사와 환자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의료 윤리 또한 의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환자의 윤리도 있다. '호열자'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환자는 의료 전후에 의사에 관한 존중을 일관되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충분한 지식을 가지려 하며 의사와 함께 치료해 나가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의사-환자 관계만으로도 부족하다. 투거의 <집단의 결정>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현대의료의 최초 결정권은 의사도 환자도 아닌, 비용문제에 개입하는 제 3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즉, 현대에서는 이 세력을 포괄하는 새로운 윤리를 생각해야 하겠다. 제3 권력이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본연의 역할을 과도하게 넘어서지 않도록 사회적 논의와 반성이 시급하다. 올바른 의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그 본질이 의학과 사람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둘째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데 최선을 다하고, 환자를 한 명의 인간으로 보는 의사로서의 자질을 함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의사와 환자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쌍방향 소통이 활발해져야 하겠다.


사람이 없으면 학문과 제도는 성립할 수 없다. 다시 사람을 정 가운데에 두어야 한다. 주체가 되는 사람은 homo sapience, 슬기인간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의사의 위치에서, 환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치고 그 소리를 존중하고 융합시키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된다. 궁극적으로 사람 중심의 '의'가 연구되고 실천되어 인간 스스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서울: 역사비평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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