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선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맛볼 기회가 거의 없다. 어쩌다 만나는 대도시에서도 본격 한식을 제공하는 식당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어느 도시에서 ‘떡볶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는 입간판을 발견했을 땐 첫사랑을 마주친 것마냥 설렜다. 채신머리없는 엉덩이는 어느새 식당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부산스런 침샘을 달래 가며 오매불망 떡볶이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게 얼마만이니? 너 보고 싶었다.‘
그런데 모양새가 영 불안하다. 빨강도 주홍도 아닌 것이 된장을 푼 듯 누리끼리하고 애매한 빛깔이다. 간판의 사진과는 사뭇 다르다. 거기에 어묵이 아닌 새송이 버섯이 들었다. 나에게 있어 떡볶이의 주인공은 단연 어묵이다. 어묵 없는 떡볶이는 프레디 머큐리 없는 퀸이라 할 만큼의 허전함이다.
그래도 삶은 달걀로 구색을 맞추려 한 노력은 나름 가상하다. 들깨에 검은깨까지, 마무리에도 제법 신경을 쓴 듯하다. 비록 식욕을 돋우는 비주얼은 아니지만 일단 한입 먹어 본다.
“......”
내 입맛은 극히 관대하다. 절대 까탈스럽지 않다. 간이 맞으면 그냥 맛있는 줄 안다. 그런 나에게도 이건 정말이지 근본 없는 맛이다. 떡볶이를 한 번이라도 먹어 본 적이 있다면 이렇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레시피 따윈 무시한 채 실험적인 도전을 해 본 걸까. 나도 그럴 때가 있으니 이해는 한다만 요식업소에서 이러는 건 지나친 모험이다. 그래, 고추장을 구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어묵 역시 공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혼자 궁시렁 궁시렁 구실을 만들어 본다. 참 부질없다. --
이러니 결국은 라면이다. 아시안 마트가 있는 대도시를 지날 때마다 라면 사재기에 혈안이 되는 이유다. 배낭에 여유 공간이 없음에도 일단 꾸역꾸역 사고 본다. 어떻게 해도 배낭에 자리가 나지 않을 땐 비닐봉지 째로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기도 한다. 모양 빠지게시리.
갈리시아(Galicia) 지방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비가 오는 날이 잦아졌다. 해발 1,200m가 넘는 산골의 작은 마을, 리냐레스(Liñares)를 떠나던 날은 새벽부터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처음이다. 이런 비는. 빗발이 잦아들길 기다려 보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기만 한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판초 우의를 덮어쓰고 길을 나선다.
세상이 온통 뿌옇다. 발 끝만 보며 길을 내어 나아간다.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 듣고 싶어지는 날이다. 안개 자욱한 인적 없는 산길에서 마주친 순례자상이 왠지 오싹하다. 인간이 아니라 다행이란 맘이 드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 이렇게 으스스스 스산한 날엔 집 생각이 간절하다. 뜨끈한 국물에 고슬고슬 갓 지은 하얀 밥이 그리워진다.
고양이 한 마리가 축사 창틀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다. 소들의 점잖은 '음머~' 소리에 '냐옹~'하고 화답을 한다. 평소엔 얄궂기만 하던 ‘냐옹~’ 소리가 날씨 탓인지 오늘은 왠지 구슬프게 들린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나 보다. 그래도 도로변이 아닌 산길이라 행복하다. 길이 아직은 진흙탕이 되지 않아 배부른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비로 인해 녹음은 더욱 짙어졌다. 눈이 편안하다.
어릴 땐 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 고립된 느낌이 들어 그랬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지금은 같은 이유로 산이 좋다.
골짜기 사이로 구름이 연기처럼 솟아오른다. 산자락 너머 유황온천이라도 있는 거니. 탄성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일!‘
무지개다.
비가 오니 이런 호사를 누리는구나.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있는 법이다.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신기루를 본 듯 황홀하다. 구름 뒤편에 숨어 있는 해님이 '나 여기 있소' 하고 무지개를 내려 주었나 보다.
피요발(Fillobal)이란 마을에 도착했다. 14km를 걷는 데 거의 4시간이나 걸렸다. 산길인 데다 비까지 내려 걸음이 더뎠다. 뜻밖에 조우한 무지개에 정신이 팔린 탓이기도 하다. 어차피 경주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나만의 속도로 걸으면 그만이다.
고되어도 행복하다. 이런 걸음은.
프랑스길의 3/4 지점 즈음 자리한 피요발(Fillobal)은 주민이 2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이다. 이런 마을에도 바르(Bar)가 있으려나. 슬슬 배가 고파 온다. 조금 더 가니 입간판이 하나 서 있는 게 보인다. 다가가 보니 바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입간판을 들여다보다 눈이 동그래졌다. 정다운 우리말로 ‘시래기 국밥’이라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대관절 시래기 국밥이라니. 뭔가 비현실적이다. 곧장 들어가 시래기 국밥을 주문한다.
드디어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시래깃국과 밥 한 그릇이 나온다. 제법 본새를 갖췄다. 한 숟가락 수북이 올려 입에 넣는다.
“어머, 이것은 고향의 맛! “
내가 기억하는 그 ‘시래깃국’의 맛과 흡사하다.
비 내리는 스페인 산골에서 뜨끈한 시래기 국밥을 먹게 될 줄이야. 감동이 밀려온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음식은 '칼도 가예고(Caldo Gallego)'라 불리는 갈리시아 지방의 전통 수프였다. 보통은 콩과 감자, 케일, 순무(turnip) 등이 들어가는데 지역에 따라 초리조(Chorizo, 스페인식 소시지)를 넣는 곳도 있다고 한다. 시래기처럼 생긴 풀이 케일이었나 보다.
정겨운 국밥 한 사발에 으슬으슬 경직됐던 몸과 맘이 노곤노곤 녹아내린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금 길을 나선다.
지친 영육을 따수이 어루만져 주었던 시래기 국밥.
이날의 시래기 국밥은 나에겐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