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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Aug 27. 2023

낡은 나침반

선은 넘지마 #2

사회가 발전할수록 생존, 안전, 정체성, 자유, 평등, 인권 등의 문제들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왔다. 그러나 표면적인 형태만 다를 뿐 그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식량이나 물자부족이 생존의 문제였다면 오늘 날은 환경오염이나 기후변화가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등의 가치도 과거에는 인종이나 성별이라는 비교적 단순화된 구조에서 발생했지만 오늘 날에는 소수자와 다양성의 문제로 변하고 있다.


물론, 사회적 맥락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문제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해결 방안은 다양해질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식, 믿음, 그리고 가치는 그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세기 동안의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형성된 전통은, 그 안에 권위가 담겨있어 시대의 변화에도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그 권위는 그 시대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사회적 가치와 믿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런 공동체의 합의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전통지향적인 사회의 구성원들은 질서와 규범에 대한 높은 존중과 경외심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무제한의 자유나 빠른 변화보다는, 아무리 엄격해도 검증된 체계와 권력이 공동체의 안정성과 연대감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통은 단순한 과거의 방식이나 습관을 넘는, 우리의 생각과 태도, 법률, 도덕, 그리고 윤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로인해 개인들은 종종 사회적기대나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며, 결국 주관적 판단과 선택을 제안해 독립적인 판단을 포기하게 만든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데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자기집착과 왜곡된 자기인식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체로 자존심과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자존심은 타인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 감정이고, 허영심은 타인 앞에서 자신이 더 우월하게 보이길 원하는 마음이다. 또한 이러한 감정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증명해야만 발현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공간은 타인이 존재하는 사회뿐이다. 자연 앞에서는 자존심이나 허영심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사자 앞에서 아무리 만물의 영장임을 외쳐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한 점에서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인식은 흥미롭다. 그는 획일화된 지식 주입식 교육 대신, 자연의 법칙에 부합하는 자율적인 교육을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은 능동성에 있기 때문에, 자유를 통해 편견에 도전하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야만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의 어려움에 대한 논란은 대부분, 좋은 대학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학교라는 장소 자체도 성공을 위한 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예를 들어 A의 가족은 가난하지만 가부장적인 권력체계를 버리고 가족 구성원 간에는 평등하고도 자유로운 상호 보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고 가정해보자. 가족의 자녀들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입시 과외를 할 수 있는 실력과 그래픽 디자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능력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학습하여 얻은 능동성의 산물이다.


반면 B의 가족은 부유하지만 서열에 의해 지배되는 권위적인 가족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내는 남편 앞에서는 불안하게 눈치를 보지만, 자신보다 낮은 사람 앞에서는 자존심을 절대 굽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내는 전인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각에서 교육은 단지 사회 서열에서 상위에 위치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두 가족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가난한 하층의 자유로운 삶과 부와 명예를 가진 상층의 억압적 삶의 갈림길에 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삶을 선택해야하는지 결정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러한 고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자유롭더라도 가난은 종종 사회적 고립을 초래하고, 그로 인해 무시와 조롱과 같은 차별적 경험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체로 부유한 삶에 더 높은 호감이 느껴진다.


이런 현실 때문에, 교육의 목적이 종종 왜곡된다. 교육은 본래 개인의 개성과 잠재력을 발휘시키는 도구여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입학 시험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본래의 교육 목적보다는, 부유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한다. 또한 좋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보다는 단지 시험 점수를 올리는 데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이 자신의 흥미나 열정을 추구하기보다는 안전한 미래를 위해 '옳다고' 여겨지는 경로를 선택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과 소질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 전체가 갖게 된 부담이나 개개인의 잠재력이 제한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인식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교육은 단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수단이 아니라,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흥미와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할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런 이상적인 교육 시스템을 실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교육 체계, 사회의 경제적 구조, 그리고 기존의 사회적 가치관 등 다양한 요인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경우 성공을 양적인 척도, 즉 높은 시험 점수, 좋은 대학 입학, 높은 소득 등으로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관은 개인의 행복과는 별개로 존재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흥미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보다는 이러한 '성공'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누구나 자신의 흥미나 잠재력을 추구할 수 있다면, 이는 개인에게 물론 좋지만, 전체 사회의 경제적 안정성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특정 분야에 과다한 집중이 이루어지거나, 반대로 중요한 분야에는 관심이 부족하게 되는 경우, 사회 전체의 균형이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개성과 잠재력을 발휘시키는 교육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사회성을 학습하는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규범과 가치에 대한 이해는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경험의 범위가 확장되어야만 사회적 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오래된 과거 아이의 성장과정에 필요한 사회성 교육은 가족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현재는 사회에 위탁되어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가족의 역할이나 규모가 작아졌고 부모의 부양 부담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제 학교라는 사회적 공간에 아이의 교육을 맡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교육의 책임이 가정에서 사회로 전환되면서, 교육은 개인의 발달과 성장을 넘어서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 세대 간의 지식과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교육을 통해 사회 전체가 협력하여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는 새로운 차원을 문을 연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다른 문제점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발달과 성장이라는 교육의 원래 목표를 넘어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비교되고 평가되는 경험을 통해 경쟁적 환경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배웠던 지식이나 도덕을 습득하는 것과 다르다. 가족 내부에서는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는 것이 큰 의미가 없으나, 학교에서는 개인의 성장과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며 경쟁과 능력비교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로 인해 사교육의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빈부격차에 의한 교육의 차별현상도 발생하게 되며. 부모의 자녀에 대한 성공에 대한 왜곡된 집착이 교육현장에 그대로 전달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의 사회화 과정에서 아이들은 또래집단이라는 독특한 세대문화에 편입되는데 이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가족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며 세대 간의 가치관 차이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대차이, 예를 들어 신기술에 대한 접근성과 이해도,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점, 경제적 안정성에 대한 기대 등에서 심각한 견해 차이를 유도하는 것이다. 결국 세대갈등의 문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보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했던 교육의 위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그것을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교육은 그저 지식전달의 수단에서 벗어나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것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누구도 쉽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제 교육의 목적은 실제 사회적 신분 상승이나 자신이 원하는 성공에 맞춰져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행위라도 정당화 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환경운동가는 화학섬유로 만든 현수막을 이용하면서도 문제의식이 없고, 동물보호단체 관련자는 동물의 생명을 지키려 안락사를 쉽게 선택하거나, 정치인은 다수를 위해 장애인을 외면하는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하곤 한다. 그리고 변호사는 고객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상대를 협박하는 경우도 있으며, 의사는 치료가 아닌 미용을 목적으로 값비싼 시술이나 약물을 처방하며, 간호사는 환자를 돌본다는 명분으로 태움을 강요한다. 시민단체는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보조금을 전용하고, 은행원은 고객의 돈을 불려주기 위해 환차익에 개입한다. 검사는 법치를 위해 무죄추정을 무시하고, 경찰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며, 종교인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헌금을 착복한다. 기업의 대주주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주가를 조작하고, 기자는 사회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거짓 정보를 생산하며 군인은 국가안보를 위해 성추행을 은폐하는 등, 이러한 모순적일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난다. 이러한 모순적인 행위가 가능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교육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가치와 인식 때문일 수 있다. 교육은 어떤 행위가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 또는 무엇이 정당하다고 여겨지는지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대체로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얻은 지식을 통해 사회구조를 무력화시키고 이용한다. 이처럼 고학력과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지식과 능력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교육 자체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런 지식과 능력이 어떠한 가치 체계와 연결되어 사용되느냐가 문제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종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해당 행동이 사회구조에 해를 입히는 요인이라도 자신에게 이익이 있다면, 그 행동을 정당화해서라도 목적을 관철시키려 한다. 이 같은 이기적인 태도는, 사회 구조와 윤리에 대한 개인의 복잡한 인식과 상호작용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언제나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 사이 긴장 관계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교육이 사회적 인식과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교육에는 반드시 사회적 인식이 반영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교육이 목적 지향적인 행위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너무나도 넓게 인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교육의 역할과 목적에 대해 더욱 신중해져야 한다.


인간의 본질을 목적이나 용도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로, 주어진 자유를 통해 자신의 가치나 존재의 의미를 창출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단순히 사회의 유지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기보존을 위한 능동성과 자유의 복합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기에 사회의 규칙과 가치,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실현한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의 능동성은 제한되며, 사회의 기대와 규칙에 의해 삶이 조절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 본래의 자유와 능동성이 억압된다. 사회적 기대, 부모의 기대 등 다양한 외부 요인들은 종종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며, 사회적 인식마저 왜곡시킨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 가해자가 권력 있는 부모의 도움으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학교가 공정성을 강조하는 데도 부모의 재력으로 스펙을 쌓는다면 어떨까? 이런 일들은 대체로 부모의 기대가 사회적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발생한다. 사회가 이 문제점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불공정과 불평등은 묵인되는 형태로 정착될 위험이 있다. 부모의 재력 혹은 권력이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장이나 성공의 수단이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고유한 가치관과 욕구를 가진 개인은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혼란을 경험하는 경우 편견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교육의 역할과 중요성이 강조된다.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개인의 자유와 꿈, 그리고 사회의 기대와 규범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편견과 잘못된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 개인은 자신만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찾으면서, 사회적 틀 내에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교육의 목적은 지식전달의 무게 중심에서 벗어나 새롭게 재정의 되어야 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꿈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교육이 추구하는 본질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다양한 가치와 시각을 끊임없이 창출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 나갈 수 있다. 


학교라는 전통적인 학습 공간만이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사회에서 형성하는 관계는 또래를 넘어 다양한 계층, 연령, 인종, 성별에 걸쳐 확장된다. 타인과의 협력, 공동체 의식,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적 책임감 등의 윤리적 도덕적 가치를 함양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고 그에 따란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를 벗어난 다양한 학습 환경과 방식을 시도할 필요도 제기된다. 물론 다양한 시행착오가 발생하며 복잡한 과정일 것이다. 또한 사회 구성원간의 신뢰와 연대 그리고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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