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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Aug 28. 2023

비극과 메타인지

선은 넘지마 #3

사랑하는 사람과의 죽음과 이별,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장애, 사회적 차별, 전쟁이나 테러,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들은 자주 그리고 우연히 우리의 주변에서 발생하며, 깊은 슬픔과 고통을 선사한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통제 밖에서 발생하며, 예측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무기력한 자신을 책망하고 괴로움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리 삶의 비극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종교, 철학, 예술, 사랑 등의 이상향을 통해 고통과 비극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존재의 의미, 세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감정의 해소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돕는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없는 우리는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이상향에 크게 의존하게 되며, 그 의존성이 우리의 규범과 질서가 되었다. 살기 위해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했으며, 그것이 타인과 함께 희망을 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약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이 없었다면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과 목적만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른, 그래서 누구에게는 오롯이 비극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때문에 멀리 있어 잡히지 않는, 그 희망과 목적이, 그 냉정해 보이는 세상에서 말이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인간의 복잡함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내면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세계 사이의 대립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아폴론은 빛과 대낮, 이성과 분별력, 형체와 개별성, 깨어 있는 상태를 대표하며, 디오니소스는 감성, 무분별, 무형, 무질서, 망각과 도취를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아폴론과 본능적인 욕망이나 욕구를 의미하는 디오니소스 두 세계는 우리 삶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힘이다. 니체가 살았던 시대의 현실은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구분되었다. 인간의 욕망은 이런 현실 속에서 이성의 규제 아래 억제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당연한 듯 오직 합리적인 이성에 의존했고 아폴론의 세계를 추종했다. 그러나 개인의 개성과 욕망을 억압했기 때문에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종말 앞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느껴졌다. 이러한 불완전함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에 크게 의존했다. 불완전함은 죽음이라는 끝이 정해져 있었고, 이를 두려워했던 인간은 합리적이고 명징한 설명이 필요했다. 불완전함과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것은 합리와 이성의 세계에서만 가능해 보였다. 인간은 아폴론의 세계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인정하기 어려워, 완전하고 영원한 '신'이나 '이데아'를 향해 돌아섰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고통 없는 영원한 삶을 상상한다면, 그것이 가져다 줄 감정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이데아에 합리적 이성, 그리고 절제와 금욕적인 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이데아를 상상했다. 자신을 억제하고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심하기 어려운 삶의 소명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현세와 이데아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이데아의 세계를 확인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 인간이 이데아라는 환상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현세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허구적인 영원의 세계를 정당화하는 것이며,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과 욕구,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재하는 세계’와 ‘되어야 할 세계’ 사이에 균열을 가져왔던 이유였다. 이 균열로 인해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며, '되어야 할 세계'의 이상에 따라 자신을 제한한 것이다. 결국 인간의 창의성이나 자유를 표현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었고,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를 찾는 과정까지 어렵게 하고 말았다.


신이 보장하는 이데아는 강력한 유혹이었다. 비록 현세에서 인간의 행동과 가치 판단을 제약하는 결과만을 가져왔더라도 희망이라는 지푸라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영원에 대한 집착이, 하지만 아무런 근거 없이 사실처럼 떠들어진 이데아는, 기어이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을 방해하고야 말았다. 그렇기에 니체는 신이나 우상에 대한 무비판적 숭배보다는 각 개인이 ‘신’과 같은 주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디오니소스의 회복" 개념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디오니소스적 원리는 도취와 망각을 통해 현실의 고통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며, 본능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얻는다. 


우리는 종종 삶이 허무하고 지칠 때 술을 찾는다. 현대인에게 때론 술자리는 모순과 제약을 잊으며, 세계와 물아일체가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는 디오니소스의 망각과 도취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실패나 죽음의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극복한 자신을 초월적 존재로 느낀다. 모든 일이 가능할 것 만 같고, 존재의 의미를 느끼며 자신감으로 충만해 진다. 그렇기에 허무한 삶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이처럼 디오니소스의 세계는 인간이 자기 존재에 확신을 제공한다. 스스로의 욕망에 진실하게 반응하게 한다. 실패와 죽음 앞에서 느껴야하는 절망과 허무함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망각과 도취, 그리고 광기의 세계에 잠시 빠져 역동성을 느끼고 도전의 용기를 얻는 것이다. 자유와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한 과정이 된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면, 또 다시 죽음과 절망, 허무와 고통이 인간을 둘러싼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결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다시 찾아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인해, 우리는 현실의 무기력함을 대신해줄 전지전능한 능력자를 찾게 된다. 우리가 때론 절박한 마음을 담아 기도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나약함이나 죄를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게 힘들어할 때 이성과 합리의 신인 아폴론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광기와 도취에 빠진 인간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꾸짖는다. “철들어라, 정신 차려라. 세상은 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신의 명령이다. 이때 인간은 자신을 반성하고 신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그래야만 혼란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데아에 가기위해 성실하고 근면한 삶을 살게 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합리와 이성은 명확한 방향과 길을 제시한다. 인간이 갖는 온갖 불안, 절망, 허무를 치료한다. 그 결과로 인간은 시작할 힘을 얻는다. 삶의 동기를 갖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공부하고, 취업하기 위해 스펙을 쌓는 일들은 합리적 이성으로부터 얻어진 삶의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결핍이 많은 삶은 스트레스를 불러오지만, 노력하는 순간에는 평온함을 느낀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기대로 현실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희망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삶도 오래가지 못한다. 안전함은 익숙함으로 변하고 어느새 지겨움과 불만족을 갖게 한다. 처음에는 취업만 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을 깨닫게 된다. 미숙한 업무 능력으로 인해 매일 혼나야하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된다. 월급을 받는 것 외에는 특별히 기대할 일이 없어진다. 시간이 흘러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 직장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업무에 대한 흥미조차 사라진다. 심지어 내일이나 모레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때론 지겨운 삶의 연속이다.


그 결과 인간은 술과 광기의 신, 디오니소스를 다시 찾게 된다. 술에 취해 과거를 회상하며 '나도 꿈이 있었어. 나는 인생을 왜 이렇게 살았을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라며 한탄하는 중년들의 모습은 누구나 한 번쯤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다시 역동적인 삶을 원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외부의 구조와 질서, 그리고 내면의 욕망과 욕구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질서와 관습, 그리고 전통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면서 정체성을 구축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실, 진정한 '나'는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에만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이 고통을 겪을 때, 광기를 통해 의지를 회복하며 더 역동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과 합리는 무질서하고 혼란한 인간의 내면을 정돈하고 질서를 만들어주는 현실적 동기이지만, 때로는 이러한 합리성이 자기구속이나 사회적 억압으로 느껴질 수 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세계는 모두 필요하다.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하나의 세계에서만 살아갈 수 없다. 이성과 합리성의 추구도 중요하지만, 충동과 광기 또한 삶에 역동성을 제공 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세계와 통합해가는 과정으로 삼아야만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이며 선택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때문에 니체는 인간에게 '힘에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을 극복하는 시도와 동시에 타인의 도움을 받아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가르침을 배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을 통해 인간이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깨닫는 것은 자신이겠지만 깨닫기 위해 타인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아폴론의 역할로, 합리와 이성, 사회적 질서와 규범, 그리고 지식을 의미한다. 인생에서의 고통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일 수 있다. 늘 번민하고 갈등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만의 도덕을 추구해야 한다.


언제나 문제는 획일적으로 정한 규칙 등에 억압되고 복종하는 인간이다. 부모나 학교로부터 일방적으로 학습 받은 전통적 질서나 규범을 의심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노예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내면의 충동과 본능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옳지 못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정말 욕망과 본능을 억압하며, 오직 합리적 이성에만 의존하여 살아가는지, 아니면 사회적 법과 규범을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주인은 스스로 부여한 도덕 기준을 따르는 사람이다. 당신은 정말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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