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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Aug 30. 2023

너에게는 옳고, 나에게는 바른 것

선은 넘지마 #4

세상은 "도둑질하지 마라.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라. 어른을 공경해라. 성실해라." 등과 같이 명확한 질서들로 가득하다. 의심할 것 없이 질서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선명한 지침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중의 중요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선과 악, 올바른 행동의 기준은 수많은 경험들이 이야기 속 교훈들로 각색되고 문화와 전통, 관습으로 완성되어 세대마다 이어져 내려온 결과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도덕적 규범과 가치 체계는 더욱 강화되었고, 우리에게 형성된 가치관은 개인의 행동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삶의 지향점을 제시하게 되었다. 


사회의 도덕적 규범과 가치 체계는 개인의 내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같은 집단의 필요성과 유지를 위해 형성되었다. 따라서 어떤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사회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과 체계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행동에 강제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살인, 폭력, 도둑질 등과 같은 행위를 피하게 된다. 사회에서 악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친절한 행동은 선으로 간주되는데, 이것 또한 같은 근거에서 비롯된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 사고방식, 생활양식의 차이로 선과 악의 판단역시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배고픔에 빵 하나를 훔친 사람에게 사회가 준 가혹한 처벌, 탈옥자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말한 배경에는 현실 세계의 불평등한 구조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친구나 친척 앞에서는 웃으며 지내지만, 등 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난과 조롱하기도 한다. 비난과 조롱하는 이런 사람들이 때로는 자신보다 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것을 보면, 놀라워할 것도 없다.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명확했던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사람들의 기대나 믿음은 때로는 배신당할 때가 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일상에서 겪는 선과 악에 대한 불확실성과 모호성 때문에 사람들은 불평등하게 태어나서 불평등하게 살다가, 결국에는 평등하게 죽는다는 생각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말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 가치관, 그리고 문화적 배경에 따라 선과 악의 기준을 다르게 해석하곤 한다. 당연하게도 사회적인 규범과 가치 체계 역시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선과 악도 절대적이고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문맥, 사회적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아이가 그의 엄마를 죽인 범인에게 보복살인을 저지른 상황을 상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의 나이와 상황을 고려할 것이지만, 살인은 어떤 경우에도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의 일부 시대나 지역에서는 보복살인이 합법인 경우도 있었고, 특정 사회에서는 종교나 관습 때문에 명예살인이 허용되기도 했다. 이는 실제로 존재했던 '피의 복수'라는 관습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복수가 널리 행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에는 이는 범죄로 처벌받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권리였다. 만약 누군가가 살해당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가해자의 목숨이었다.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다른 부족에 속할 경우, 이로 인해 부족 간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부족의 한 구성원이 당한 일은 모든 부족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 '피의 복수'를 피해 복원의 관점에서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 동일한 가치를 교환한다는 측면에서 그것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살인인 경우에는 가해자의 목숨으로 돌려받을 수 있지만, 도둑질이나 상해와 같은 범죄는 피해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기가 쉽지 않아 해결하기도 어렵다.

 

누군가가 물건을 훔쳐 사용한 경우, 동일한 물건을 돌려받을 수 없을 것이다. 상해의 경우에도 같은 수준의 폭력으로 보상하는 것이 적절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때로는 과한 행위가 새로운 사망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최초의 상해에 상응하는 가치를 돌려받았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또 다른 살인이 발생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라는 새로운 채권과 채무의 관계만 생성되며, 결국 본래의 피해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피의 복수' 제도는 현재 법질서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현재 법체계는 복수를 개인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국가에 위탁하여, 법률에 근거하여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범죄행위는 누구든지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처벌받고, 복수살인 역시 범죄로 인식되어 처벌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도덕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성년자인 아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왜 살인자의 형량은 가벼울까? 왜 국가는 범죄에 상응하는 응당한 보복을 실행하지 않았을까? 왜 피해자를 억울하게 만들었을까?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피해자를 무시하고 평안하게 생활하는 가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일까? 엄마를 죽인 살인범의 일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아이가 결국 살인범을 살해하려고 할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들은 아이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영역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명확한 도덕적 기준이 있다. 그러나 아이의 죄책감이나 분노에 대한 공감은 복잡하고 편하지 않다. 그래서 아이가 엄마를 죽인 살인범에 대한 사회적인 처벌이 불충분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의 억울함과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복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생각으로 복수를 정당화한다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모든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대다수가 그 행동을 옳다고 여긴다면, 복수를 허용하는 법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사회는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며, 그러한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떤 결과를 기대하느냐?"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개인이 갖는 선과 악, 그리고 사회에서의 선과 악 사이의 접점에서 혼란을 느낀다. 누군가의 선은 다른 이에게는 악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철학자 니체는 전통적인 도덕 개념인 선과 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가치 체계를 창조하게 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도덕적인 선악이라는 구분이 결국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주인과 노예라는 두 존재를 통해 도덕을 대립적으로 설명한다. 주인의 도덕은 자신의 기준으로 좋음과 좋지 않음으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노예의 도덕은 주인에 대응하는 선악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주인과 노예의 도덕적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주인은 노예를 지저분하고 약하며 자신감이 없는 존재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를 악으로 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예는 주인의 부를 유지하고 늘리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존재였다. 노예의 삶과 세계가 주인의 시각에서 좋지 않게 보였던 것은 주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달랐기 때문이다. 주인이 추구했던 것은 강함, 긍정적인 태도, 화려함 등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주인의 도덕은 선과 악으로 규정된 옳고 그름이 아닌, 자신에게 있어 좋은지 혹은 좋지 않은지에 따라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노예는 주인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도덕을 구축했다. 주인이 좋아하는 강함은 가식적인 행위로, 긍정적 태도는 허세로, 화려함은 사치로 비난한다. 노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주인에게 표출하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는 주인이 좋아하지 않았던 지저분함을 소박함으로, 약함을 선량함으로, 자신감 없음을 배려심으로 재해석하며 이것들을 선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노예의 도덕은 주인에 대한 반발과 원한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을 스스로의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인간의 위장된 도덕이라고 인식했다. 진정한 도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 있는 노예의 도덕은 주인에 대한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때문에 니체는 "노예 의식이 있는 인간은 좋은 평판에 기뻐하며 나쁜 평판에는 괴로워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그 가치를 만들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주인은 타인에게 자신의 도덕 기준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주목하고 긍정하는 것에서 도덕을 찾는다. 이런 주인의 도덕은, 타인을 부정하며 도덕을 만들던 노예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노예 도덕이 우세를 보여 왔다. 선과 악이라는 노예의 도덕규범이 보편적인 질서와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도덕 기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니체는 상대적인 선악적 도덕이 자신만의 가치 체계를 창조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금욕주의와 같은 규범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조차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규범들은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부정하며 고통을 주었다.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와 동일했다.


물론 자신만의 도덕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행동의 범위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합의된 수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행동의 범위나 기준은 법과 같은 강제력에 의해 통제된다. 법이 우리에게 도둑질이나 살인을 금지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도둑질과 살인이 허용된다면, 사회는 결국 붕괴하고 개인은 위험에 노출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둑질과 살인을 금지하는 것은 최소한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법이 제정되었다 해도 모든 예외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편법적인 접근이나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살인과 같은 예외적인 사례는 해결이 어렵다. 또한 어떤 상황은 법을 준수하는 것이 도덕적인 딜레마를 야기할 수 있다. 음주운전을 엄격히 금지하는 사회에서도, 예를 들어 응급 상황에서 음주 상태로 병원에 가야 하는 경우와 같은 다양한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위독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음주운전을 한 경우, 이런 행위를 도덕적으로 간단히 비난하기는 어렵다. 물론 음주운전은 분명히 위험한 행위이며 사회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른 도덕적 판단에서는 상대성이 존재한다. 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그 배경이나 상황, 동기에 따라 그 판단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생명을 구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 중에서도 우선시된다. 따라서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했다면 우리는 이를 도덕적으로 옳은 판단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법을 위반한 행위로만 보지 않고 상황의 특수성과 중대성을 고려해기 때문이다. 


니체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니체가 말하는 선악 개념은 기존의 도덕적인 가치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도덕 개념을 "노예도덕"으로 규정하고, 약자가 강자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덕 체계라고 비판했다. 대신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도덕을 "지배적 도덕" 또는 "주인도덕"을 주장했는데, 이는 생명력과 창조성을 가진 자가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을 구하려는 강력한 동기에 따라 위법을 감수한 행동이라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한 행위가 된다. 물론 '노예도덕'의 관점에서는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비난할 수 있지만, '주인도덕'의 관점에서는 그 자체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행위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음주운전과 같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이 만든 가치에 의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법은 기본적인 우리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법을 지키는 것이나 위반하는 행위는 모두 상황에 따라 억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법이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이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선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법을 위반하면서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면, 심지어 그러함에도 그를 처벌하지 못한다면, 법을 준수한 사람은 손해를 보게 된다. 이는 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우리가 기대한 상황은 아니다. 


또한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을 위반하는 경우에도 법을 지키는 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선인지 묻게 된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복잡하고 언제나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기란 어렵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각각의 행동과 결정은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사회전반에 걸쳐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했든 선악의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다. 이는 권력의 구조와 그 시대, 그 문화의 상황에 따라 결정되며,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약자와 권력이 없는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니체의 주장은 권력의 동력과 도덕 간의 연관성을 잘 보여줄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의 도덕관념이 절대적인 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개인의 주관적 가치관과 신념을 강요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 경험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치관이나 신념과 충돌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회적 규범과 도덕은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개인의 가치관도 유동적이다. 그러하기에 더욱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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