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ome Aug 31. 2023

정의와 신념

선은 넘지마 #5

우리는 살면서 많은 불공정을 경험 한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스펙을 쌓지 못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거나 취업하지 못하는 경우, 부모가 가난해서 학업을 포기해야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릴 수도 있다. 때론 출신, 성별, 신체, 종교와 같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그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을 자주 비교하게 되며 때론 자존감의 상실과 무기력을 느낀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공정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를 완전하게 해결하기란 어렵다. 수많은 경제적, 제도적, 문화적, 전통적인 요인 그리고 개인의 특수한 경험에 기반한 편견이나 선입견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이 종종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모든 개인이 만족할 수 있는 사회란 현실적으로 어렵고 그러한 모순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자주 인내심과 같은 긍정적인 현상으로 포장되며 사람들의 존경을 유도한다. 또한 불공정을 호소하는 사람을 현실을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으로 규정하거나, 근거 없이 불평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노력에만 성공이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때때로 불평등이나 불공정한 상황을 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아무리 부조리한 일들이 발생해도 그것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불공정은 일종의 사회적 타협처럼 보이며, 문화적으로 정당한 현상으로 여겨져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왜 나만 참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우리를 괴롭힌다. 실제로 참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정말로 우리는 왜 참아야 하는 것일까? 일방적으로 복종이 요구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복은 먼 곳에 묻힐 것이다. 사회가 불공정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결과는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분열뿐이다. 


불공정은 '정의(justice, 正義)'라는 개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가 믿는 기본적인 가치와 규범은 개인이나 집단 간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받는 대우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만약 불공정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곧 정의의 부재를 시사한다. 이러한 불공정한 사례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에서 정의의 본질을 탐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해석은 개인의 도덕적 가치와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사회적 경험, 문화, 그리고 역사적 맥락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구체적이지 않고 일반적이며, 때로는 추상적인 특성마저 있다. 만약 정의가 항상 모두에게 일관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전까지 믿어왔던, 또는 불공정의 최소화라고 여겨 따랐던 행동이 잘못된 선택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존 슈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개념의 생성되는 과정을 이해해야 그 개념이 가리키는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밀에 따르면 정의는 라틴어에서 '정당한', '공정한', '올바른'의 의미를 지닌 '유스툼(justum)'으로 표기한다. 이 단어는 '명령하다'라는 뜻을 가진 '유베오(jubeo)'에서 파생된 '유숨(jussum)' 즉, '명령된 것'에서 발전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법'을 나타내는 '유스(jus)'도 '명령하다'는 의미의 '유베오(jubeo)'에서 파생되었다. 그리스어에서의 정의를 가리키는 '디카이온(δίκαιον)'이라는 단어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이 단어는 법과 정의의 여신인 '디케(δίκη)'에서 유래했지만, 그 의미는 법정 소송이다. 독일어에서도 정의는 '레흐트(recht)'로 표현한다. 어원은 '라이트(right)'과 '라이쳐스(righteous)'로 '사물이 똑바로 서있는 상태'와 '법률'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프랑스어에서 정의는 '라 쥬스티스(La justice)'로 표현되며, 이는 법원이나 검찰과 같은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언어적 관점으로 우리는 정의와 법의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법이 항상 정의라는 의미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반드시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직접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은 '이미 규정된 방식'이나 '미리 정해진 틀'을 의미하지만, 정의는 ‘보편적 옳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법과 정의를 연결 짓는 경우, 정의란 단순히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사전에 설정된 규정이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정의는 이미 정해진 '옳음'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현재의 법과 규칙에 순응하는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개인의 행동이 법의 내용에 기반하여 결정되는 것을 볼 때, 정의는 결국 법에 대한 복종의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 정의는 옳음이라는 추상적 전제가 아닌 ‘법이 옳음’을 지칭하게 된다.


예컨대 노예제 사회를 생각해보자. 이 사회에서 노예 신분인 사람들은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미리 규정된 방식에 따라 삶을 이어간다. 이들 노예들은 주로 전쟁에서 패배한 적국의 포로나 범죄자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은 당연한 듯 부정되며, 사회적 지위도 부여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으로 노예제도는 법적 규범과 질서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에 그 당시 법률 체계에서 합법적인 제도다. 노예들은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었고 사거나 팔 수 있는 물건과 같이 취급되었다.


그러나 주인에게는 이익이 되는 제도지만, 노예에게는 부당하다. 이처럼 법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이를 따르지 않으면, 기존에 유지되고 있었던 전통이 파괴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또한 이로 인해 사회의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현상을 정의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회의 안전성은 법의 정당성보다는 그 법을 따르는 행위에서 나온다. 법은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그것을 따르는 것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옳음'을 단순히 '정의(justice, 正義)'라고 한정짓기는 어렵다. 정의는 특정한 '옳음'이 아니라 '법을 따르는 것'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모순일수 있다. 다시 노예제 사회를 보면, 노예에게서 보이는 옳음은 명백히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는 이런 불평등한 신분 체계를 법과 제도적 규범으로 정당화한다. 노예도 주인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간이다. 단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노예로 결정되는 순간, 이들은 재산이나 생산 도구와 같은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에서는 이런 상황을 정당하게 볼 수 있지만, 노예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부당하다. 노예는 당연히 사회에서 요구하는 법과 질서를 따르는 것에 대한 동기가 없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법을 따르는 것'을 정의라고 본다면, 노예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부여된 신분을 수용하며 법에 따라 노예의 본문을 착실히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때 노예가 구현할 수 있는 정의 실현은 영원히 노예로서의 삶에 묶이는 것이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에게 보장되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예 스스로 이런 제도를 부당하다고 느끼거나, 이를 근거로 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노예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인품 좋은 주인이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노예는 영원히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세상은 변화 없이, 주인과 노예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구조를 유지한다.


그럼 이렇게 노예제도가 유지되는 것이 과연 정의일까? 그러니까 법을 지키는 준법이 정말로 정의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는 명백하게 불공정한 법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도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부당한 법이라면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정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합리성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행위가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노예가 자신을 억압하는 법에 반기하고 저항하는 행위를 정의라고 부를 수도 있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인간의 본능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노예제 사회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나타났던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찬탈한 독재정부에 대한 저항 등도 유사한 예시일 수 있다. 인류는 자신의 처지가 법과 제도 사회적 규범에 부당한 차별을 받는다고 인식하는 순간 어김없이 저항하고 싸워왔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볼 때 법을 준수하는 것을 반드시 정의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경우 정의는 법에 대한 복종, 즉 준법에 국한되지 않고 부당함에 대한 인식과 태도일 수 있다. 따라서 법은 지시하는 내용과 집행에 있어 정당성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정당성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타당성에 있고 그것을 확보해야 그 준엄함이 유지된다. 그래서 오늘 날의 법치주의는 적법절차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이는 무조건 법에 복종하라는 일방적인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법이 부당하다면 맞서 싸우는 것, 그러니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억압에 따른 복종이 아니라, 저항에 있다.


누구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부당한 법이라도 이를 수용해야한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2세기 로마의 법률가인 울피아누스가 한 말이다. 또한 그 의미조차 왜곡되어 전달되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악법도 준수해야 한다는 준법정신을 증명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악법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의 중요성과 정당성이었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저서 '크리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수행한 이유로 재판에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것을, 그의 친구인 크리톤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탈출을 권유하며 돕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간절한 제안을 거부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부분만 보면,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마치 '악법도 법이다'라는 입장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 과정, 그리고 그가 받은 혐의와 배심원들이 제시한 조건을 살펴보면, 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혐의는 국가가 인정한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00여명의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를 죽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가 철학을 포기하면 석방해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삶을 가치 없는 삶이라며 거부했다. 그는 단호하게 배심원들에게 "나는 당신들에게 복종하는 대신 신에게 복종하겠다. 나의 목숨이 달려있는 한 절대로 지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했고, 결국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 재판 과정에서 보여지 듯 소크라테스는 법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톤이 탈출을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한 이유도 이와 같다. 법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결정은 불의를 행하라는 명령과 불의를 당하라는 명령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의를 행하라는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불의를 당하라는 명령을 수용한 것이다. 불의를 당하라는 명령을 수용해야만 했던 이유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의 권유로 탈출했다면, 그는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어딘가에서 철학을 계속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껏 주장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 입장에서 그것은 지극히 모순적이다. 불의를 행하라는 명령에 순응하게 되는 순간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범죄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 정당함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법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그리고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정의임을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신념을 갖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사례와 같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일 수도 있다.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신념이 언제나 올바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옳은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념은 때로 불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지속성과 안전을 항상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은 개인과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념은 사회에서 더욱 복잡하게 작용한다. 신념을 갖는 당사자뿐 아니라 타인의 행동이나 의사결정에도 영향을 주며, 사회구조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신념은 개인의 단순한 자기믿음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1989년 10월, 프랑스 크레이의 한 중학교에서 세 명의 무슬림 여학생이 수업 시간에 히잡을 착용한 사건이 있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히잡을 벗으라고 지시했고,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퇴학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히잡을 벗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학교가 요구한 공적 명력을 거부한 학생들의 종교적 신념에 의한 저항이었다. 이들은 히잡을 벗기 거부하고 추방과 퇴학을 각오했다. 


이에 학교는 결국 이들을 추방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프랑스는 사회적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가 커지게 되자 학교와 학생들은 수업시간 이외에 히잡을 착용할 수 있도록 합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려 10년간이나 프랑스에서 지속적인 논란이었다. 개인의 신념적 요구와 사회적 규범의 대립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2003년에는 프랑스 정부는 ‘스타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를 근거로 의회는 2004년 3월 15일에 ‘학교 및 공공기관에서 종교적 상징물 착용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의 공공기관에서는 더 이상 히잡을 착용할 수 없게 되었다. 개인의 신념과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 충돌한 결과였다. 프랑스 사회는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안정이라는 두 가지 명확한 대립에서 안정을 선택했다. 무슬림 여학생의 신념을 사회에서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개인의 신념보다 전통적 질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비록 결과가 부정적이었다 해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른 기회에도 사회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험이 축적되고 사회의 가치와 기준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변화를 촉구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인의 신념이 적극적으로 사회에서 수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이유다.  


예컨대,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들은 인종차별에 반대하여 시위를 생각해보자. 당시 미국은 법적으로 인종차별을 허용하고 있었지만, 흑인들은 이를 부정하고 차별금지를 신념화해 저항했다. 당시에는 쉽게 수용되지 않았고 이들은 탄압받았다. 그러함에도 결국 인종차별 법률은 철폐되었다.


사회의 법과 제도가 개인의 신념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때로는 그 반대의 상황도 발생한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그 법과 제도에 의문을 가지거나, 그것을 뛰어넘는 행동을 한다. 법과 제도만이 인간의 행동을 좌우한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은 점차 약화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단순히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변모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판단력을 발휘할 기회가 줄어든다. 법과 제도가 결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행동하게 되면, 인간의 창의성과 독립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큰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다.


미국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저술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이러한 위험성이 잘 나타난다.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대량 학살에 큰 역할을 한 전쟁 범죄자였지만,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평범한 인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가까웠던 이웃들 또한 그를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평범한 사람, 아이히만이 나치를 대신해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라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아렌트는 이런 모순적인 현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아이히만의 태도와 생각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분석을 통해, 아이히만이 공무원의 신분으로서 자신의 도덕적 신념보다 법과 명령을 우선시한 사람이었음을 확인했다.


실제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업무가 공무로서의 책임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인간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업무를 수행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악행을 저지르게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 것으로 그들이 특별히 악한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이나 외부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아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법의 명령을 따랐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행위가 모든 사람들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준법정신에 입각해 그의 행동을 판단한다면, 정의를 실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와 일치하는지는 않는다. 어떤 이유로도 학살은 정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학살을 정의로 간주한다면, 잘못된 관습이나 법률에 따른 과거의 피해를 구제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사회와 개인의 상호작용에 있어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인간의 행위를 목적 합리적 행위, 가치 합리적 행위, 정서적 행위, 전통적 행위로 제시한다. 아렌트는 개인의 행동이 어떻게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었지만 베버는 그런 행동이 어떻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념이라는 개념을 개인의 행동과 사회적 환경의 상호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목적 합리적 행위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며, 가치 합리적 행위는 종교나 윤리적 가치, 또는 의식적인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중점으로 한다. 때문에 이 두 행위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목표나 신념을 이루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강한 매우 능동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믿는 신념이 너무 강해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자신의 목적 실행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반면 정서적 행위는 개인의 감정 상태에 따라 발생하는 행위이며, 전통적 행위는 오랜 관습과 습관과 같이 경험한 것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행위이다. 이 두 행위는 모두 개인의 내부에서 발생해서 작동하는 수동적 행위다. 그래서 이러한 행위는 종종 감정에 지배되거나 과거의 관습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행동원인이 외부나 전통에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변화와 혁신에 대처하기 어렵고, 사회적 명령과 복종의 관계에 익숙하다. 이것이 아이히만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다.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기계적 행위는 어떤 윤리적 의식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불의한 일에 눈감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이거나 정서적인 행위의 한계는 그것이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이런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안정적이며 변화를 피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목적 합리적 행위와 가치 합리적 행위는 확고한 신념과 목표를 가지고 행해지지만, 이것들은 때로 사회적 충돌을 초래할 수도 있다. 목적 합리적 행위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선택하고, 가치 합리적 행위는 신념을 위해 행동한다. 그러나 그로인해 이기적인 행동이 될 수 있어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 그것은 대체로 자신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의한 신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법 자체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계속 변화하며, 이 변화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과 대응의 일환이다. 그래서 법은 우리의 행위를 제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고정된 올바름이 아니다. 법은 변할 수 있어야 하며,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 그리고 사회가 갖는 정의의 개념 역시 변화와 발전이 가능하다. 정의에 대한 개념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도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으며,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판단의 근거로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때에 따라선 희생과 고통이 수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과 희생은 더 큰 가치를 위해 필요한 것일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선 개인이나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진정한 신념은 분명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변화의 복잡한 과정 속에서 모든 상황을 감안하는 것 자체일 수 있다. 인간은 성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의 이전글 너에게는 옳고, 나에게는 바른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