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ome Sep 02. 2023

더 나은 자신

욕망의 이해 #1

어느 날,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꿈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내 꿈은 축구공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아이는 황당한 얼굴로 "그게 뭐야! 사람이 어떻게 축구공이 돼?"라고 반문했다. 그런 아이에게 장난을 이어가며 "내 배를 잘 봐. 볼록하잖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축구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왜? 꿈이 축구공이면 안 되는 거야?"라고 반문했다. 아이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응. 축구공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아."라고 쿨한 대답을 했다. 너무 쉽게 긍정해준 아이의 대답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어떤 꿈을 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꿈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떠오르는 것들은 대체로 좋은 직장이나 자산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꿈과 직업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내 삶에서 꿈은 현실적인 필요성이었다. 그래서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이 좋았다. 세상은 노력과 결과라는 분명한 원칙에 따라 움직였고, 인생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조차 곧잘 꿈이란 결국 좋은 직업이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꿈은 상대방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의무감으로 변해갔다. 선명하긴 했지만 치열한 노력과 경쟁에서의 승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자주 실패로 인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고, 그 모든 책임은 내 준비가 부족한 탓이었다. 스스로 게으름을 인정해야 했고, 마치 죄를 짓는 사람처럼 반성하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덤덤하게 꿈은 단지 무한한 가능성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이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실현 가능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실의 어려움 앞에 내 꿈은 자연스럽게 희미해지고, 종종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사라져 버렸다.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꿈이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욕망과 감정을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꿈은 잠을 자면서 꾸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억압이나 충족되지 못한 욕구나 감정들이 표출되는 방법이다. 그래서 꿈은 무의식적이다. 


그런 관점에서 아이에게 말한 축구공이 되는 꿈은, 어쩌면 단순히 축구공이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아마도 사회적 관계, 경쟁, 목표 달성 등을 상징하는 내재된 욕망을 의미할 수 있다. 꿈이란 결국 개인적 욕망이고 그 이면에는 우리가 사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가치관이 깊숙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개인의 무의식적 욕망만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에 기반한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인 작용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억압으로 인해 포기한 수많은 가능성도 유사한 면이 있지 않을까? 


프로이트의 말처럼 꿈은 무의식과 문화, 사회가 합쳐진 복잡한 결과물이므로, 어느 정도는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 문화의 상호작용의 이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관점에서 꿈은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현실과 깊은 연결을 맺고 있는 매우 특별한 개념이 된다.


물론 프로이트의 이론이 모든 꿈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주로 성욕, 충동, 억압된 감정 등을 중심으로 꿈을 해석했기 때문에 이는 무의식의 복잡한 영역을 단순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진 우리의 모든 욕망, 기억, 상상력을 반영하면 꿈에 대한 해석은 더욱 다양할 수 있다. 

우리의 문화, 가치관, 신념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 경우 이때 만들어진 감정이 사회적으로 연결되며 꿈을 통해 드러난다고 할 때, 이 경우 꿈은 잠을 자면서 꾸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대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공이나 부를 꿈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사회에서 그것들이 갖는 의미 때문일 수 있다.


이렇게 꿈은 개인의 무의식적인 욕망과 문화적 요소를 동시에 반영한다. 따라서 이를 현실적인 목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체로 억압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그것을 결핍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 음식, 공기, 물과 같은 결핍을 지니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결핍 외에도, 사랑과 인정, 성공과 명예, 지식과 경험에 대한 욕구는 계속해서 생산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결핍'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채워져 있다. 


완벽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결핍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불만족, 빈곤, 불안, 불평등 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대체로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즉 '결핍'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형식은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의 연속’이라는 모습을 갖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성공적인 삶이나 물질적인 부가 중요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족과의 시간이나 자연과의 교감 등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이처럼 꿈과 행복은 개개인가 갖는 결핍들과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의 결핍과 관련해,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이 세상에 먼저 존재한 후에 비로소 그 존재의 본질이나 의미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만하는 존재다. 물론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꿈이 반드시 현실적인 것이어야만 하거나, 사회적인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핍에서 시작되며 이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목적을 찾아 나아가며, 자신만의 가치를 창출해가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결핍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의 노력과 선택이 반드시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르게 진행될 자신의 인생 한 부분을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결과적 가능성으로부터 고립되고 만다. 간혹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누군가가 자신의 과거 선택을 후회하고 삶을 공허하게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때 난 왜 그런 선택을 해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라는 후회를 하는 이유다. 현재의 처지에 대한 후회의 감정은 결국 타인이 가지고는 있지만 자신에게는 없는 결핍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명확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행복이나 꿈의 실현이 대체로 사회를 향해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타인들이 이 사람을 “무능력자”, “게으름뱅이”라고 취급하고 모욕하면 결국 이런 경험을 통해 사람은 자존감을 상실하게 되고 삶의 의미조차 잃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사업이나 투자에 성공한다면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는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기대나 조건을 무시하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예시는 단편적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은 분명하고, 그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감정이 생기는 것도 명확하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확률적으로 사회적 조건이나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유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자신의 삶 보다 사회적 조건이나 지위에 관심을 더 두게 된다. 이런 이유로 꿈이라는 가능성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지향과 목표로 전환 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인 것은 이러한 목표의 실현이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느냐에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게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타인의 욕망을 추종하거나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꿈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가능성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갖게 되는 순간 꿈은 사라지는 것일까? 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새로운 꿈은 반드시 만들어진다. 그것은 억압에 반응하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객관적 상황들 예를 들어 경제적, 문화적, 생리적인 것들을 초월한다. 


그래서 꿈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열정과 독창성 그 자체일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꿈은 단순히 현실적 욕망에 그치지 않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무의 상태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과 동시에 확대되는 모든 가능성인 것이다. 즉, 나라는 존재 자체로부터 발전 가능한 모든 확률 그자체가 꿈인 것이다.


꿈에는 형식이 존재하기 어렵고, 이는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진 우리의 모든 욕망, 기억, 상상력을 반영한다. 그래서 꿈에는 창의와 창조로 가득하다. 결과적인 실패라 해도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한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며, 그 한계에 맞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 할 수 있다. 자유롭고 싶은 욕구가 제한된 현실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바꿔 놓는다. 그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꿈의 본질은 창조적인 힘이고, 현실은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발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과학 기술과 과학으로는 불가능한 시간여행을 꿈꾸는 것을 헛된 공상이나 망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으로 비행기를 만들어 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라도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 창조적 생각을 실현한 예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핍을 채우려는 이 노력 속에서 우리는 경험과 성장,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이라는 가치를 창출한다. 이러한 가치는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감정으로 보상되며, 그 행복은 과정과 결과 둘 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기에 꿈은 목적의 성취를 넘어 과정 자체가 된다. 이는 꿈이 단순히 결핍의 해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의 만족과 행복이라는 보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꿈은 곧 행복과 삶의 지속성의 문제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갖는 욕망의 본질이다.

작가의 이전글 정의와 신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