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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04. 2023

유행의 탄생

욕망의 이해 #2

우리의 문제들은 대체로 결핍으로부터 시작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인 모든 문제들은 대체로 부족하거나 가지지 못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결핍은 태생적이며 사회적인,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능적인 욕구와 타인이 만들어낸 사회적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결핍을 해결하거나 충족하면서 사람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삶의 만족도를 높이며, 안정된 사회적 위치를 찾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주관적인 행복을 느끼며, 다양한 생활영역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기에 결핍의 충족과 그 과정은 곧 행복으로 연결되는 경로라 할 수 있다. 


사회가 지속되는 한, 우리가 경험에 이름을 부여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한, 결핍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무한하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결핍을 채울 수는 없다. 우리의 삶에서 결핍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그에 따라 완전한 행복도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복이나 불행의 감정이 결핍에 의해 좌우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도 결국 공허하고 허망한 것이 된다. 우리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면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갖는 것에 불과해진다.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결핍을 과장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감정은 자주 삶의 태도로 들어난다.


그래서 더 나은 미래와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동기를 잃게 되고, 삶의 의미마저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야말로 결핍의 덫이라고 할 수 있다.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역동적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을 해소하지 못함으로 얻어지는 패배감과 좌절로 그 힘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련에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라는 용기를 촉구한다. 


이처럼 결핍을 반드시 해결해야하는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면, 우리는 행복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행복은 결핍의 충족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요소에 깊숙이 뿌리를 둔 복합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관련하여 경제사학자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의 연구는 흥미롭다. 이스털린은 1946년부터 1970년까지 19개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소득 증가에 따른 주관적 행복 만족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소득과 같은 물질의 절대적 충족과 사회적 관계에서 상대적인 충족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연구였다. 


조사 결과는 미국, 영국, 독일과 같은 선진국의 국민들은 50년 전보다 더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음에도 행복만족도는 오히려 감소했으며, 부유한 선진국보다 가난한 국가의 국민이 행복지수가 더 높았다. 또한 일본의 경우도 1987년의 최하위 소득집단의 소비능력이 1958년 당시의 최상위 소득집단과 거의 같거나 우월할 정도로 증가했음에도 만족도가 상승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물질의 절대적 충족인 소득이 증가하더라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행복의 효용도 감소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물질의 만족으로부터 얻어지는 행복은 결국 한계상황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행복이 상대성을 갖는다는 이른바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s paradox) 이다. 이스털린의 연구결과는 결핍의 상대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행복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행복의 상대성을 강조하며, 소득만으로는 결핍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인간의 자기 위치를 통해 얻어지는 감정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핍과 행복에 대한 이해에 있어 단순한 물질적 충족을 넘어 사회적, 정서적 요소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결핍욕구와 성장욕구로 구분했다. 결핍욕구는 기초적인 생리적 욕구, 안전욕구, 사회적 소속과 사랑, 존경과 인정의 욕구를 포함하는 반면 성장욕구는 자아실현 욕구인데 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매슬로는 이러한 욕구들이 순차적으로 만족되어야 다음 단계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안전욕구를 추구하지 않으며, 안전욕구가 충족되어야 소속의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욕구가 위계적인 구조로 구성되어 있어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상위욕구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견해다. 


그러나 매슬로의 이러한 분석은 인간의 욕구를 너무 단순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때문에 헝가리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이러한 매슬로의 이론을 더욱 확장한다. 그는 플로우 이론을 제시했는데 개인이 완전한 몰입과 집중을 경험하는 상태인 플로우를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얻어진 행복은 존재욕구의 실현에서 얻어지는 감정이기 때문에 물질이 충족되면서 사라지는 결핍욕구와는 다른 지속성을 갖는다. 정의의 실현, 아름다움의 추구, 잠재능력 개발과 같은 유형에 의미부여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순간 삶의 만족도와 그에 따른 행복감은 오랫동안 유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게임 퀘스트를 통과하기 전 플레이어는 답답함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통과하는 순간 고통에 대한 보상으로 강렬한 성취를 맛보게 된다. 이러한 감정을 플로우 즉 열락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몰입할 수만 있다면 성취를 통해 얼마든지 자아실현이라는 지속성 강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완전한 몰입, 목표의 명확성, 즉각적인 피드백, 도전과 기술 수준간의 균형, 시간 감각의 소실, 자기 통제와 자발성, 활동자체의 보상이 이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지속성을 갖게 될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며, 그로인해 객관적 측정이 어렵고 개인적 차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정적으로는 중독의 위험마저 가지고 있다.


중독은 대체로 심리적, 생리적, 사회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약물과 같은 물질이나 행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의존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성취할 목적이 없을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게 인식되면서 무기력한 일상이 반복된다. 그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알코올이나 마약과 같은 약물에 의존하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유사한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목적에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경우 현실을 회피할 목적으로 약물 등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독은 약물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도박, 인터넷, 게임, 섹스 등과 같은 행동을 반복 수행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특정 행동의 반복을 통해 뇌의 보상 회로를 자극하여 쾌감을 경험하는 것인데, 결국 그로인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 그래서 행동중독도 약물중독과 마찬가지로 뇌의 손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부정되지 않는다.


물론 행복은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감정이지만, 이러한 감정도 우리의 신경 전달 물질 및 호르몬에 의해 조절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약물이나 행동이 일으키는 화학적 변화로 인해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엔돌핀과 같은 물질이 작용하게 되면 행복이라는 감정이 발생한다.


도파민은 기분, 욕구, 보상, 학습, 운동 조절과 같은 인간의 다양한 기능에 관여하는데, 수치가 증가하면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어 쾌락을 느끼게 된다. 세로토닌은 기분과 욕구, 수면, 식욕 등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고, 노르에피네프린은 스트레스와 연결된 호르몬으로, 기억, 집중력, 긴장감, 기분 등에 영향을 미친다. 엔돌핀은 편안함을 주는 호르몬으로, 통증 완화 및 기분 개선에 관여한다. 


특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 이런 호르몬과 신경 전달 물질들도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약물 투여와 유사한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화학적 반응이 뇌의 균형을 교란하고, 이로 인해 정상적인 뇌 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신경 전달 물질과 호르몬의 불균형 상태는 뇌의 구조적, 기능적 변화를 유발하며, 일단 이런 손상이 발생하면 회복이 매우 어렵다. 이는 뇌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성질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중독을 치료하더라도 변형된 뇌의 기능이 과거 상태로 원상회복 되는 것이 아니라, 약물이나 행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쾌락적 욕구를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충동을 참고 또 참는 것이 치료인 것이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동과 그에 따른 보상이 수학적 명확성이 없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과열된 행동으로 인해 얻어진 쾌락적 보상은 때론 중독이라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그로인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면서 정말로 추구해야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자동차가 없는 직장인을 생각해 보자. 이 직장인은 매일 새벽에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을 한다. 시간에 쫒기는 것, 인파에 시달리는 것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출근하는 과정에서 지하철 광고판을 보게 된다. 행복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 자동차 모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직장인은 그 광고를 보고 자동차를 구매하면 자신도 광고의 모델처럼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동차를 구매한다. 그렇게 자동차라는 결핍이 해결된다.


그러나 직장인에게 이어지는 현실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야근을 하는 날, 졸음운전을 해야 한다. 회식을 하는 날, 술 한 잔이라도 마시면 차를 두고 귀가하거나 대리운전을 이용해야 한다. 어느 날, 신형 자동차를 구매한 동료를 보고 질투심이 폭발하는 마음도 든다. 그렇게 자동차는 단순한 결핍에서 해결되지 않는 다른 문제들을 만들고, 더 나아가 사회적 계급과 위상의 상징으로 변화한다. 이로 인해 이 직장인은 더 이상 자동차가 주었던 행복이나 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해 새로운 구매의무와 명령이 되고 만다.


만약 이 직장인이 자동차와 같은 물질이 아닌 자아성장이나 자아실현에 관심을 두었다면, 아마 더 오랫동안 만족스러운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성장이나 자아실현도 타인과의 관계없이는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의미가 있다고 외치는 것조차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확인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직장인이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를 타인이나 사회의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형성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진 개별적인 생각과 가치,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형성되는 자아는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특별함이란 결국 우리가 사회에서 존재하고,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의미를 찾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직장인이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수하면서 다른 삶의 영역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나 본질적인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자연스럽게 조성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인 결핍감과 열등감을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열등감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직장인은 단지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을 뿐이었고 그로인해 고통스러운 노예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사회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과거 자연 상태의 인간은 사자나 코끼리보다 육체적으로 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과 행동능력을 통해 그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얻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면서 스스로의 성취를 얻은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열등감은 극복될 수 있다는 예시로서 중요하다. 결국 인간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과거의 원인이 현재 결과로 이어진다는 결정론을 거부했다. 예를 들어 은둔형 외톨이가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는 그의 과거 경험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개인적 선택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들이 현재 상황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지만, 결국 그것은 외톨이가 스스로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선택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선택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문제였다. 우리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기에,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으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체로 현재의 처지는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들러의 관점에서 이는 자신을 방어하려는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요소를 탓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실수나 실패의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탓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사람들이 이러한 성향을 갖게 되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개인의 기본적인 성격과 태도 때문일 수 있다. 수동적인 사람들은 과거 무시와 학대, 잦은 실패를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고, 능동적인 사람들은 지지와 격려에 익숙하며 성공의 경험이 많았을 것이다. 아들러는 이렇게 만들어진 성격과 태도를 '생활양식'이라고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수동적인 생활양식은 타인에게 의존하고 도전을 피하는 반면, 능동적인 생활양식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도전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동성과 능동성은 노력여하에 따라 누구나 변화가 가능한 영역이었다.


아들러의 이러한 생각은 분명 행위자의 자유, 선택, 그리고 그 결과적인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 세계의 복잡한 환경적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는 한계도 보인다. 물론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만 축소한다면 아들러의 생각이 일면 타당할 수 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사회에서는 다를 수 있다. 실제로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명확하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인식과 조건, 그리고 환경적 영향이 작용하고 있다. 개인의 긍정적인 생각이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부당한 명령을 받은 개인이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책임을 지는 것이지만, 회사의 기업문화나 관리자와의 관계 등에 영향을 받아 해고와 같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성실하게 일하여 부를 축적하려 했으나 전쟁이 발생해 모든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 


특히 전쟁과 같은 사회적, 정치적 요인은 개인의 선택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측면이 있음에도 개인의 삶에는 중차대한 영향을 끼친다. 물론 아들러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전쟁을 벌이는 책임 있는 위치의 개인들이 능동적 선택을 통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을 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애초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인 자연재해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는 현실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제약적인 요인을 극복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인간의 발전 자체가 경험과 학습의 산물이고, 현재의 가치관 역시 과거의 경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판단의 기준도 당연히 그것으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선택은 과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 대신, 우연한 다른 계기를 통해 수동적인 태도에서 능동적으로 전환될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사회의 구조는 자신의 행동과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결정할 때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구조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선택과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과 그들의 상호작용, 그리고 권력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쉽게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일이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숨을 쉬고 식사를 하는 것이 개인의 결핍과 욕구 혹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행위는 완전한 독립적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고립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성장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호작용이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독창적 활동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욕구와 새로운 욕망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성공과 실패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활동은 자율과 상호의존성이라는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과 선택은 자유의지에 의해 가능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결국 타인의 인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만의 노력이나 선택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나는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자기성찰적인 질문에 덧붙여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세계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추구하는 질문을 더해야 한다. 다소 모순적으로 보일지라도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식이 이렇다.


데카르트가 증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역시,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는 타인과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타인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독립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독창성을 추구하면서도 평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는 모순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혼재하는 것이다. 이는 빛나는 삶과 차별받는 삶이 다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사회에서 갖는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감정적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그 경계에서 결국 우리의 선택은 대체로 평범함을 향하게 된다. 고립의 고통을 느끼는 것보다야 부족하더라도 보장되는 안전이 더 큰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불안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매우 능동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유행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남들과 같아지려는 최선의 노력.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더라도 안전을 선택하고자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게 세상은 유행으로 가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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