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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05. 2023

나의 위선

욕망의 이해#3

사람들은 누구나 현재보다 더 풍요로운 미래를 원한다. 또한 이를 실현하는 일이 평화롭고 순조롭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일자리 부족, 소득격차, 성차별, 사회적 불평등 등 제약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갈등과 다툼 혹은 경쟁에 휘말리는 등 부정적인 상황에 노출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의 이해와 협력이 없이는 해결되기 어렵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지만 이러한 조건에서는 약육강식이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풍요로운 것도 평화로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부정적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협력할 수 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협력적 눈가설”이라는 흥미로운 이론이 존재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람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유독 인간의 눈에 흰자가 많은 이유다. 다른 동물은 눈동자와 흰자의 색이 유사해 눈동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인간은 뚜렷한 흰자와 눈동자의 색차이로 눈동자의 위치와 방향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로인해 사람들은 사냥과 같은 협력적 활동을 할 때 다른 사람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그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더 빠르게 인식하고 반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눈의 구조가 진화하면서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비유도 그래서 가능하다. 인간은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했고 사회발전과 번영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치를 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나 의도를 파악하는 고도의 사회적 행위라 할 수 있다. 특정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보기 위해 상대방의 눈을 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과학적 증명이라기보다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회라는 공간에서 인간이 공존해왔음은 분명하고, 또 그 발전에 있어서도 서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매개가 되었음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사회는 완벽한 전체의 모습을 갖추면서도, 독립적인 개체들이 모여 다양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우리가 타인에 대한 친절과 예의 그리고 상냥함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 싸우는 것 보다는 상호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삶의 만족도가 높다. 이것은 분명 자기희생을 통해 보장되는 최소한의 이익이지만 종종 타인에게 예속되고 종속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하는 행동은 그것이 사회적 목적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단지 우리가 타인에게 공개하는 자신은 협력을 촉구하고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모습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라 사회적 자신이 된다.


그러나 단지 타인과의 협력적 관계를 위해 적절하게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은 사회에 맞춰진 삶의 형식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결국 피로감으로 이어지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에 있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다양한 가치, 기대, 규칙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 및 의도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자주 타인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 것도 특별한 감정이 아니다.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오롯이 들어내도 위험하지 않은, 그리고 편안하고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고립된 공간을 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감정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회에서 분리된 완벽한 고립적 공간이 존재할까? 사실 그런 공간은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가 독립적 존재임을 강하게 느껴 관계에 경계를 두고 있더라도, 그 경계가 나와 타인,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경계는 인식적 균열을 의미할 뿐, 그것이 실질적 장애가 될 수 없고, 다만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통의 목표나 가치를 확인하는 기준인 탓이다. 


이처럼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이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다. 우리가 살기위해서는 최소한 생리적인 욕구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추위나 더위를 견디기 위해 재화들이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완벽한 고립은 물질적, 생리적 의존성으로 인해 불가능한 일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혹은 단지 직접 만날 필요 없이도, 뉴스를 통해 소상공인들의 어려움, 택배 노동자들의 죽음,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청년들이 주식이나 가상화폐 투자에 열광하는 등의 사회적 현상을 접한다. 이런 소식은 우리 감정을 요동치게 하지만, 불운이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뿐, 무기력한 자신을 책망하며 고통을 느끼는 게 전부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반드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정직한 생산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게 느끼곤 한다. 이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인해 우리는 눈을 감고 귀를 막는 위선적 회피를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는 지속되는 혼란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그렇기에 혼란의 반복과 연속된 삶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스피노자(Spinoza, Baruch De)는 이러한 인간의 위선적인 행동을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존재 속에서 노력하기 때문에 위선은 결국 그런 노력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충동이나 욕망을 실현하면서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고립된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보장된다고 여길 수 있으며 자신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실행함으로서 실제로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억압의 해소 여부와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종종 자기기만을 통해 행복으로 연결시킨다. 그러나 이는 자기결정과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만약 전쟁이나 기아 혹은 자연재해 등의 억압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경우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며 발전시켜온 힘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쉽게 외면하는 사회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애초에 사회란 인간의 부족한 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냉정한 사회란 개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 돕거나 협력하는 것이 사회의 본질적 실체다. 무관심이나 냉정은 오직 자연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감정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자유로운 신체적 물질적 상황에 놓여있어 행복함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불행을 알게 되는 순간 마음의 어딘가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진정한 행복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원인과 결과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고 행동하는데 익숙하다. 이는 이미 사회의 질서나 구조에 억매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 억압적 질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영향을 끼칠 수 없고, 때론 억압적 사회에서조차 상대적으로 유리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을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반드시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도 여전히 억압적 질서에 종속되어 있어 그들의 행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외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사회의 일반적인 질서나 구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진정으로 좋은 것인지 혹은 바람직한 것인지를 구별해내는 힘을 갖는 것에 있다.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균형과 다양성을 고려한 새로운 사유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누군가가 부와 명예로부터 행복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부나 명예를 다른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때문에 더 큰 부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적합하고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부와 명예를 얻었다손 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배고픔에 굶주리는 모습에 괴로움을 느낀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부와 명예는 행복의 원인이 아닌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부와 명예가 반드시 행복을 보장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진다. 이처럼 부와 명예에 따라 감정이 달라진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만족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적합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모든 개인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무기력에 빠져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실현될 수 있다. 무기력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결국 자유가 없는 세계, 즉 인간의 마음이 사라진 세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비판 없이 무감각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좀비'라는 비유로 묘사하곤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좀비의 비유를 좀 더 확장해보자. 좀비는 형태적으로 인간과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가상의 존재다. 그들은 자아를 상실하고 불사의 몸을 가지며, 사냥 본능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 인간이 아니었던 좀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이들은 살아 숨 쉬고 있는 자유를 가진 인간만을 사냥한다. 인간을 뜯어먹는 것이야말로 좀비의 존재적 목적이고 자신들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한 노력이다. 인간을 물어뜯어야만 자신과 같은 좀비를 생산할 수 있고 그들의 세계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좀비가 되어버린 인간은 사냥 기능만을 착실히 수행하며 더 이상의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족에 대한 미움도 없으며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것을 돌아보는 법이 없다. 썩어버린 몸으로 소화기관도 작동하지 않는데도 오직 살아있는 인간만을 찾아서 사냥하고 섭식하려 애쓴다. 정말 난감한 재생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집단의 동일시가 유지되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야 말로 원인과 결과라는 필연적 체계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판타스틱한 일이다. 


마치 세계가 통계적 분포의 평균값으로 획일화된 것만 같다. 그렇다면 좀비는 인간의 획일화된 생활양식과 질서를 상징한다. 또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규정된 규범체계를 반영한다. 그래서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수동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물론 규칙과 질서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좀비가 되는 순간 안전을 보장받고 힘과 권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과 두려움에서 해방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자유를 가진 인간일 수는 없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개성을 가진 인간이 좀비로 살아갈 수 없는 이유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결핍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결핍 없는 좀비는 아무런 욕망이 없다. 그리 보면 차라리 고통에서 해방되어 좀비가 되는 것도 좋은 선택인 것만 같다. 삶이란 고통의 연속인데 굳이 고통을 느끼며 살아갈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비가 되어 안전함을 보장받을 것인가 아니면 고통과 공포를 느끼는 자유를 가진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우리는 쉽게 자유를 가진 인간으로 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자유를 가진 인간으로 산다는 건 고통을 감수해야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이 쉽지 않은 것이다.


좀비의 세계에서 정상은 자아와 의식 없는 죽어있는 인간이 분명하다. 반면 살아있는 인간은 자아를 통제하는 의식을 가진 비정상적 존재다. 따라서 인간과 좀비가 공존하기 어렵다. 좀비는 인간을 포획해 자기 영토를 무작정 확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사명이고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 어떤 타협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세계는 완전무결함과 옳음의 가치로 채워진 것과 같다. 생이 없는 죽음과 소멸로 가득한 세계다. 자유를 원하는 인간의 입장에선 개성의 소멸과도 같다. 


때문에 억압적으로 규제되고 획일화되어 거대한 구조나 질서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옳음과 가치는 두려움을 불러온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인간으로 살기 원한다면 저항 할 수밖에 없다. 좀비에게 뜯어 먹히지 않기 위해 절실히 도망치고 저항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몸과 마음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자아와 의식을 가진 인간만이 진정한 자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이고 그러한 인간들이 만든 사회도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인간다운 삶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 문제는 규범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를 억압하는 태도이며 그것을 획일화와 규격화의 규범체계로 만들어내는 우리의 인식에 있다.


도구처럼 보인다는 것으로 인간이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좋은 것인지 바람직한 것인지 구별할 힘이 없는 나약한 인간이며, 자유가 없는 인간일 뿐이다. 인간의 자유란 도착할 목적지에 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살아갈 힘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가 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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