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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Sep 06. 2023

신의 주사위 놀이

욕망의 이해 #4

인간은 누구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거나 준비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지만 이것만으로 불확실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어쩌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고대에는 점성술사나 무당과 같은 특별한 지식과 직관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의존하곤 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뉴턴의 운동법칙 발견으로 의존의 대상도 변하기 시작했다.


뉴턴은 물질의 움직임에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신의 거룩한 계획에 관심을 두기보다 과학적 원리와 증거에 기반한 논리적인 세계를 신뢰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술자, 의사, 변호사, 과학자와 같은 다양한 전문가들이 점성술사나 무당을 대신해 미래를 예측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노력과 보상에 대한 기대가 반드시 같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전문가들의 예측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본다" 혹은 "열심히 살지 않는다"라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여전히 무력감을 느끼곤 하는데, 그 이유는 복잡한 삶의 선행 조건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그저 제한된 공간과 환경에서 계산 가능한 특정된 범위에서 얻어진 부분적 미래만을 보장받을 수 있는 탓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려는 이 '열심히'라는 노력은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열심히'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의미와 가치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단지 '열심히'라는 추상적인 말로 노력을 정의하려고 시도한다. 누군가 열심히 살라고 충고하더라도 그 양과 질의 명확한 정도를 알 수 없다. 결국 주어진 일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묵묵해 해 나가는 것이 삶의 태도와 사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열심히'라는 노력의 정도나 방향성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부담과 불안을 안겨준다. 이러한 불안은 미래를 대비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지만 딱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열심히'라는 노력은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는 행동임이 분명함에도, 우리는 자주 지치게 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우리는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우리는 최선이라고 믿는 결정을 내릴 뿐이다. 그렇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결과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사건들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 철저히 결정된다는 전제 아래에서, 만약 누군가가 현재의 모든 조건들과 물리법칙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계산할 수 있다면, 과거와 현재의 상태를 기반으로 미래의 모든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사건이 그 원인과 결과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예측할 수 있다. 사실 과학적 입증방법이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태풍의 이동경로 지진과 해일의 영향, 세계 경제의 흐름을 예측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렇게 예측된 결과는 실제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초기 정보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는 불확실성으로 남겨진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결정론적 이론은 인간의 주관성, 자율성, 그리고 선택의 가능성이 직접적인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 우리의 작은 행동과 같은 일들이 미치는 연쇄적 가능성이 제거됨으로써 예측된 결과가 실제적 사실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삶이 단순히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로 이루어진 연쇄라고 본다면 우리의 어떤 노력도 무의미하게 될 수 있다.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고, 선택하며, 그 결과를 통해 미래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불확실성에 대한 나름의 대응방식인 '열심히'라는 노력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노력으로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 미래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주체적 능동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뉴턴이 제시한 물리법칙만으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양자역학의 등장은 우리의 노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양자역학은 불확실성 원리를 통해 세계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며, 그 불확실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완벽한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물론 물리학과 삶의 태도를 연결 짓는 것은 다소 과장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글의 목적은 우리가 어떤 삶의 태도를 선택해야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충분히 하나의 견해로 제안할 수 있다.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의사인 토마스 영(Thomas Young)의 이중슬릿실험이 시작이었다. 그의 실험은 빛을 두 개의 슬릿에 통과시키는 실험이었다. 빛이 입자로 존재한다면 각각의 슬릿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빛은 서로 간섭하며 특이한 패턴을 만들어냈다. 이는 놀랍게도 물질이 두 개의 슬릿에 동시에 통과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입자의 경우 이러한 결과는 불가능하다. 이 실험은 빛이 입자의 성질뿐만 아니라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현상이 단순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실험이 재현되면서 전자와 같은 다른 입자에서도 발견되었다. 특히 전자의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관찰 카메라를 설치했을 때는 전자가 한 개의 슬릿만을 통과했지만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았을 경우 동시에 통과한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카메라의 설치 유무에 따라서 전자의 행동이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자가 동시에 두 슬릿을 통과하는 파동의 성질과 입자로서 한 슬릿만 통과하는 성질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이는 결정론과 같은 인과성의 개념을 흔드는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던 원인과 결과라는 고전적인 물리법칙을 재정립해야 했다. 


이에 양자역학은 최대 확률 원리라는 개념을 통해 물질은 한 순간에 하나의 상태지만, 측정하기 이전에는 확률적 가능성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이는 측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에서야 하나의 상태로 결정되며, 측정 이후의 관찰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안한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불만을 표출했다. 물리현상은 예측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제한된 조건에서 물질의 행동은 상호작용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다. 물질이 어떤 변화의 상태가 될 때 특정 초기조건에서 확률적으로만 예측이 가능하다면 그 무엇도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따라서 전자가 파동과 입자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결론은 우리의 미래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든 사실이 아니게 된다. 그러함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물질의 입자와 파동실험이 신의 주사위놀음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불확정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관여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러한 파동-입자 이중성의 개념은 슈뢰딩거의 유명한 고양이 실험에도 잘 나타난다. 고양이의 생존 혹은 죽음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그의 고민은, 물리학의 근본적인 불확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물질의 상태는 오직 확률로서만 이해가 가능하고 우리가 그것을 측정하는 것은 그 확률이 현실의 하나로 붕괴되는 순간을 확인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는 삶의 태도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자는 관찰하는 우리의 개입에 의해 입자와 같이 인과적인 운동을 보이며, 반면 관찰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파동의 성질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운명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라는 명제와 '운명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라는, 보통은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있음을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그 노력은 정당하다.


물론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측 가능한 안정성을 선호하며, 그 결과로 인과적 법칙에 의한 세계를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보여주듯이, 세상은 항상 우리의 예상과 일치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양한 스펙을 갖춘 취업 준비생이라고 생각해보자. 이 취업 준비생은 자격증이나 외국어 능력 등을 통해 기업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며, 그런 기대를 가지고 노력한다. 그러나 만약 국가 경제가 악화되어 기업들이 채용을 중단한다면, 그의 기대와는 달리 모든 노력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런 상황은 취업 준비생이 노력과 결과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믿고 있었다면 그 믿음을 깨뜨리게 된다. 그는 노력에 비해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확인하고, 외부 상황의 불확실성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불확실성은 불편함과 불안을 초래한다. 이것이 우리가 결정론적 세계관을 유지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전자가 입자와 파동으로 동시에 존재하고,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듯이, 우리 세계는 모순적이면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물리학과 인생 모두에 적용되는 법칙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과적 세계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취업 준비생의 노력이나 기대는 그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외부 환경과 조건에 의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수한 학교에 입학하고 부유한 친구들과 사교하는 것이 노력만큼이나 사회적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성공에 대한 확률적 가능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가능한 것이다. 우수한 학군, 명문 대학, 그리고 대기업에서의 취업이 인생의 주요 목표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외부적 요인인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라는 사실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이러한 인식을 고려하면, 우리의 운명은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환경적 요인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생각도 충분히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불확실성 원리와 슈퍼포지션 원리는 미시적 세계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불확실성의 원리는 간단히 말해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이일을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는 미래의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말이기 때문에 정확한 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슈퍼포지션 원리는 여러 상황이나 선택이 하나의 결과로 합쳐진다는 의미다. 이는 우리 인생은 여러 선택의 가능성이 있고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재의 자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과 맺었던 모든 인간관계, 영화나 드라마, 읽었던 책까지 그 모든 것들이 현재의 자신을 만드는데 기여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인생은 불확실한 요소로 가득 차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선택과 가능성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러니까 인과 법칙에 따라 통제가 가능한 경우를 살펴보자. 카지노에서 37개의 칸이 있는 룰렛 휠을 돌리면, 공은 특정 숫자의 칸에서 멈추게 된다. 이 게임에 여러 번 참여한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에 상관없이 이길 확률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결국, 승자는 언제나 카지노가 된다. 이를 고려하면, 룰렛 게임의 승패는 인과적 질서에서 허용되는 형식에 따라 카지노에 의해 조작된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를 이끌어내는 모든 가능성은 카지노의 룰렛 게임 형식 내에서 발생하며, 참여자의 승패 확률은 카지노 주인이 룰렛을 어떻게 조작하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만약 처음부터 룰렛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카지노 주인에게 운명을 맡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선택의 결과는, 그 선택을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면, 마침내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태어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님의 선택이었으므로, 부모님에게 책임을 돌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을 바라보면, 끝나지 않는 원인 찾기에서 우리의 인생이 마감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행동의 주체로서의 자유와 의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행위의 주체는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선택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분명하다. 또한 그로인해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행위의 주체인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우리가 운명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선택의 권리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점은 대체로 분명하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어리석은 자는 기회를 놓치고 운명을 탓한다"는 말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연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연결된 체계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룰렛을 처음 개발한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개발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룰렛의 작동 방식과 형태는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다. 만약 룰렛이 조작되지 않았다면, 또는 카지노라는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룰렛이라는 게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게임에 참여하여 패배하는 사람의 운명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카지노에 들어가 룰렛에 참여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이 간단한 연속적인 행동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룰렛의 형태 외에도 다양한 변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승패의 인과관계가 게임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약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카지노의 룰렛과 같이 제한적인 환경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는 세상의 모든 변수를 파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과는 초기 변수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사건의 연결지점에서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운명은 자신의 노력과 의지뿐만 아니라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별의 폭발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선택은 타인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지만, 이는 동시에 고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결정하는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가져오는, 혼란스런 우연성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이유다. 

카지노에서의 룰렛 게임은 인과법칙을 따르지만, 만일 누군가가 그 룰렛을 조작한다면, 그 결과는 참가자의 예상을 벗어나 인과적 연쇄가 깨져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선택이 타인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일지라도, 그만큼 우리는 혼란스런 우연성의 세계에 더욱 노출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룰렛을 조작할 수 있는 제작자에게는 필연적 체계일수 있다. 


그래서 물질의 입자성과 파동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입자성은 물질이 인과적 체계를 따르는 움직임을, 파동성은 동시성, 즉 물질이 동시에 여러 상태에 있을 수 있는 물리적 현상을 나타낸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얽힘'이라는 현상이 이러한 개념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얽힘은 두 개 이상의 양자 입자가 서로 연결된 상태에서 발생한다. 얽힌 상태에서는 한 입자의 상태가 변경되면, 그와 연결된 다른 입자의 상태도 즉시 변한다. 이 과정은 시간의 순차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파동으로 존재하는 물질의 양 끝에서 업스핀과 다운스핀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발견들은 물질의 특성을 단순한 입자성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한계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삼차원적 공간과 일차원적 시간의 분석 틀로는 양자역학의 복잡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를 더욱 심화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틀린 시공간, 고차원적 공간과 같은 새로운 수학적 틀을 도입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변수들이 연결된 공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를 결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양자역학은 인간의 선택과 운명이 수많은 변수와 환경적 조건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이것은 곧 운명이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여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다.


물질의 입자성과 파동성, 그리고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선택에 대한 더욱 풍부하고 복잡한 이해를 얻게 된다. 이런 이해는 우리가 삶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노력을 지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른다면 알기위해 애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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